잘했을 때 창밖을, 못했을 때 거울을 보자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선명하다. 단순히 훈련량을 늘리고 선수들을 다그쳐 성과를 내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매겨둔 한계를 뛰어넘게 함으로써 심리적 자신감을 갖게 하는 목표가 더 크다.
소문은 무성했다. 대전역에서 직접 봤다는 목격담이 나왔다. 프로야구 한화 팬들이 들떴다. 부산에서 봤다는 이들도 있었다. 롯데로 옮기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광주 야구장 근처에 집을 계약했다는 구체적인 얘기도 흘러나왔다. 어떤 선수한테 전화를 걸어 구단 상황을 체크했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소문이 돌 때마다 해당 구단의 팬들이 기대감을 높였다. 김성근 감독(72)을 둘러싼 해프닝이었다. 결국 실제로 움직인 곳은 한화였고, 김성근 감독은 한화 유니폼을 입게 됐다. 2002년 한국시리즈 이후 '야신'이라 불렸던 김성근 감독이 현장으로 돌아왔다.
프로야구 한화는 지난 10월 25일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했다. 3년간 총액 20억원의 계약조건이었다. 팬들은 김성근 감독을 애타게 찾았다. 서울 중구 한화 본사에서는 김성근 감독 영입을 요구하는 1인 시위가 벌어졌다. 한화 팬들은 김성근 감독 영입 청원운동까지 펼쳤다. 유튜브에는 김 감독 영입을 원하는 동영상이 시리즈로 만들어져 유포됐다. 실제 본사 앞에서 열린 1인 시위는 한화가 김성근 감독을 영입하는 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근 효과'는 대번에 나타났다. 김 감독은 10월 28일 대전구장에서 입단 기자회견을 열었다. 선수단 대표 김태균이 단상에 올랐다. 김 감독이 김태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보다 꽤 크네"라며 웃자 김태균의 얼굴이 빨개졌다. 팬들 중 누군가가 "김태균, 왜 긴장하고 그랴"라고 외치자 폭소가 터져나왔다. 구수한 충청도 농담은 단지 농담에 그치지 않았다. 김 감독의 복귀로 한화 선수단에 긴장감이 넘쳤다.
김 감독의 야구는 '이기는 야구'다. 이기는 길을 찾기 위한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과거 구단 프런트와 마찰이 생겼던 부분이 이 지점이다. 구단은 '적절한 지점'을 요구하지만 김 감독에게 '적당한 지점'은 없었다. 김 감독은 거꾸로 "기업의 목표는 수익이다. 목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다. 야구단의 목표는 승리다. 당연히 승리를 위해서 모든 리소스를 쏟아붓는다"고 말했다. 김 감독이 구단 사장보다 모기업, 모그룹의 총수에게 더 인정받는 것은 이 같은 목표 설정의 방식과 달성 수단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훈련량을 늘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것은 야구의 승리를 위한 첫 번째 단계다. 팀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단, 특정 선수에 의존하는 야구를 하지 않는다. 이기는 가장 가까운 길은 한 명에 의존하는 야구가 아니라 팀 전체가 함께하는 야구다. 누군가 흔들렸을 때, 이를 채워주고 도와줄 다른 이들이 있는 야구다.
김 감독은 취임사에서 "여러분이 과거에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이제부터 잊어라. 주전이었든 백업이었든 그 또한 잊어라. 나는 선수 개인에 의존해 야구를 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그것만 생각하라"고 했다. 그 현실은 유니폼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운 야구의 현실이다.
목표도 설정했다. 2015시즌을 앞둔 준비는 '수비'로 잡았다. 김 감독은 "바깥에서 본 한화 문제는 역시 수비 아닌가 싶다. 앞으로 캠프에서 어떻게 그 부분을 제대로 하느냐에 따라 사활이 걸려 있지 않나 싶다"며 "우리 훈련의 반은 수비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마무리 훈련에 대해 설명하며 "닷새 훈련 중에 이틀은 수비만 할 것이다. 우리 훈련계획에 대해 힌트 하나만 얘기한다면, 김태균은 서드(3루)에서 반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1루수인 김태균이 3루로 전향한다는 뜻이 아니라 3루 수비 훈련을 통해 수비 강화를 가져가겠다는 뜻이다.
김 감독은 "조금 전 나오기 전에 선수들을 보니 한화 선수들은 이발값이 없나 싶더라. 머리 깎고 나오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머리를 싹 다듬었다. 이를 두고 '한화 고등학교'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하지만, 미국 프로야구 명문팀 뉴욕 양키스도, 일본 프로야구 명문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모두 장발과 염색, 수염이 금지된 팀이다. 연패에 빠진 뒤 머리를 박박 미는 삭발보다 힘을 모아 연승을 하겠다는 이발이 훨씬 나은 것은 당연하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선명하다. 단순히 훈련량을 늘리고 선수들을 다그쳐 성과를 내려 하지 않는다. 훈련량은 기술 향상의 목적도 있지만, 스스로 매겨둔 한계를 뛰어넘게 함으로써 심리적 자신감을 갖게 하는 목표가 더 크다. '나는 이만큼 했다'는 자신감이 선수를 성장시킨다. 훈련량의 증가는 선수들의 공감이 없다면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크게 마련이다.
김 감독은 "내가 원하는 것은 훈련을 왜 하는지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김 감독은 훈련 때 강연과 면담이 함께 이뤄진다. 김 감독이 한화 마무리 훈련에서 보낸 첫 번째 메시지는 "잘했을 때 창밖을 보고, 못했을 때 거울을 보자"였다. 잘했을 때는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미래를 보자는 뜻, 못했을 때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탓을 할 게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다시 한 번 살피자는 뜻이다. 김 감독은 "선수들만이 아니라 나를 향한 다짐"이라고 덧붙였다.
"잘했을 때 창밖을, 못했을 때 거울을 보자"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 훈련에서 김 감독 특유의 강훈련이 시작됐다. FA 자격을 얻는 김경언은 '협상' 대신 '훈련'을 택했다. 1년 전 은퇴를 선언했던 외야수 정원석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고 싶다"고 적었다. 고된 훈련이 언제나 끔찍한 고문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김태균과 정근우는 흙으로 엉망이 된 유니폼으로 쓰러진 사진을 통해 인터넷을 달궜다. '지옥훈련'이 희화화되고, 뉴스로 소비되는 방식에서 부정적인 요소가 있지만 실제 훈련과정을 살피면, 그 훈련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코칭스태프의 노력이 만만치 않다. 땅볼 타구를 받아내는 수비 훈련만 따지더라도 선수들은 타구를 나눠 받으며 훈련하지만 코치는 그 공을 혼자서 다 때려내야 한다. 김 감독이 '사단'과 함께 이동하는 것은 그 과정을 함께할 수 있는 코치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감독에 대한 기대감은 역시 성적을 기본으로 한다. 한화는 최근 3년간 내내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김 감독은 감독으로 취임한 첫해 모두 4강 이상의 성적을 냈다. 1984년 OB 감독이 됐을 때 58승1무41패로 3위에 올랐고, 1989년 역시 태평양 감독으로 3위를 기록했다. 1991년 삼성은 3위, 1996년 쌍방울 감독 때도 첫해 팀을 2위로 끌어올렸다. 2007년 SK 감독 첫해에는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화의 마지막 가을야구는 류현진 데뷔 이듬해였던 2007년이었다. 한화에 김성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