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단편 소설] 마지막 전우
마지막 전우
물방울이 얼굴에 닿는 느낌이다. 왼쪽 눈을 뜬다. 조심스럽게 살며시 뜬다. 눈썹이 말라 붙었는지 눈 뜨기가 힘들다. 양쪽 눈을 다 뜬다. 힘겹다. 물방울 하나가 오른쪽 눈에 떨어진다. 시야가 일렁인다. 물방울은 비다. 비가 내린다. 한 방울은 입술에 한 방울은 눈썹 아래 떨어진다. 빗 방울이 제법 굵다. 조금씩 늘어나던 빗 방울이 금새 많아진다. 혀로 입술을 핥는다. 말라붙은 입술이 촉촉해 진다. 비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다. 입을 벌린다. 목 젖 사이로 빗물이 타고 흐른다. 입 안에 빗물이 고인다.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이 고인다. 비가 가득 고이면 삼킨다. 한번 더 빗물을 삼킨다. 달다.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서인지 단 맛이 난다. 오른 손을 들어 눈을 훔친다. 더러워진 손 마디에 피가 묻어 있다. 왼손을 든다. 왼손에도 피가 잔뜩 묻었다. 손을 비벼 피를 씻는다. 손가락 사이의 굳은 피 딱지를 벗긴다. 손톱에 낀 피는 닦이지 않는다. 손에 피가 묻었다면 얼굴에도 묻었을 것이다. 얼굴을 문지른다. 하지만, 거울이 없으니 제대로 닦였는지 알수 없다. 세수 하듯 닦았으니 대부분 닦였을 것이다. 몸을 일으킨다. 이상하다. 느낌이 없다. 다시 힘을 준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일으켜져야 한다. 안 된다. 이번에는 고개를 든다.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시야가 부족하다. 팔꿈치로 땅을 버틴다. 상체를 어깨죽지까지 들어 올린다. 허리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온다. 통증을 참으며 아래를 내려본다. 젠장. 내 몸을 다른 녀석이 덮고 있다. 얼굴을 내 아랫도리에 파 묻은 채 죽어있다. 군복이나 철모를 보면 아군이 확실하다. 누군지 확인하고 싶다. 손을 뻗어 철모를 벗긴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겨우 움켜쥔다. 누군지 확인한다. 소대장이다. 소대장이 내 아랫도리에 얼굴을 박고 죽어있다.
*
휴전 협정이 지지부진 했다. 양쪽모두 이 기회에 땅 한 뼘이라도 더 뺏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사실 휴전 협정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일을 눈 앞에 두고 후퇴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놈들을 다 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북괴는 이미 괴멸된 상태였다. 중공군은 보급 선이 길어졌다. 게다가 장개석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이 아직 중국의 배후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다시 힘을 내면 백두산 정상에 태극기를 휘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백석고지를 점령하는 명령이었다. 양구를 한 눈에 들여 다 볼 수 있는 백석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는 아니었다. 양구는 인제와 화천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도시다. 춘천으로 가려면 화천으로 가면 그만이다. 속초로 가려면 인제를 통과하면 된다. 양구에 의미를 두자면 두 지역을 견제 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 정도다. 단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화천이나 인제를 얻고 양구를 내주면 적이 우리를 향해 머리를 내 밀은 형상이 된다. 당연히 꺼림직한 상황이다. 휴전 회담의 막바지였다. 전쟁이 막바지라는 것은 누구나 다 느꼈다. 중공군이든 유엔군이든 모두 지쳐있었다. 우리만 이 악착 같은 전쟁의 끝을 보고 싶어했다. 특히 강원도에서 작전을 펼치는 부대는 금강산은 반드시 손에 넣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아니 믿음 이라기 보다는 염원이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시작은 양구였다. 양구를 얻으려면 먼저 백석고지를 손에 넣어야 했다. 높은 위치에서 도시를 훤히 내려다보면서 작전을 펼치는 것은 절반의 승리를 가져가는 것과 같다.
우리 중대는 사공팔 고지의 오른쪽 능선을 따라 공격 하기로 했다. 사공팔은 백석고지 바로 옆에 붙은 작은 봉우리다. 높이가 높고 경사가 가파른 백석을 바로 공격 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백석을 점령 하려면 이 사공팔 고지를 먼저 손에 넣어야 했다. 그래야 백석 정상을 더 가까이서 관찰 할 수 있다. 내가 속한 연대가 사공팔을 맡았다. 지원은 충분했다. 백석의 인민군이 사공팔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두는 작전도 병행되었다. 공격 한 시간 전에 포병대대의 지원포격이 있었다. 항공 전력까지 지원받을 상황은 아니어도 포 지원으로도 충분 할 줄 알았다. 관측 병의 보고를 종합하면 사공팔의 인민군은 한 개 대대 정도로 예상 되었다. 작전 개시와 함께 우리는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예상외로 적의 자동화기와 박격포의 기세가 만만찮았다. 두 개 대대를 투입했지만 고지의 절반도 못 오르고 후퇴했다. 문제를 찾느라 반나절을 허비했다. 우선 적의 규모가 한 개 대대 급 이상 이라는 추산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화력의 구성이 좋았다. 애초에 두 개 대대로는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연대 전체를 투입해도 고지 점령을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돌파구를 찾을 때까지 포격만 지루하게 이어졌다. 고지위로 하루 꼬박 포탄이 떨어졌다. 우리는 멀리 사공팔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정비를 했다. 차라리 포 사격으로 적이 전멸하길 바랐다. 그냥 앉은 자리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빨갱이를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은 이럴때 뿐이었다. 총알이 머리위를 지나가는 상황에서는 오직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차라리 적군이 집단 전염병이라도 걸렸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하루 뒤 정찰기가 떴다. 보고가 날아 왔다. 적 참호의 손실이 많았다. 다만 죽어나간 적도 많은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사단 사령부의 재촉이 이어졌다. 연대장은 개가 되었고 돼지가 되었다. 이틀 안에 사공팔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연대 전체를 작전에서 뺀다는 엄포가 들렸다. 연대장은 안달이 났다.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별을 달아야 한다. 연대장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 뿐이었다. 전쟁의 전체 방향이 어떻다거나, 죽어나간 병사의 숫자가 몇 명이라는 것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이번 전쟁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기회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수록 그의 인내심도 바닦을 보였다.작전회의가 열렸다. 대대장은 고지 점령 날짜를 이틀 뒤로 통보했다. 이틀은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작전의 부재로 인한 공격의 실패로 볼 때 이틀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지루하고도 긴 시간이다. 어쨋든 빠르고 간단하게 이 작전을 매듭지어야 한다. 너무 많은 출혈은 다음 작전을 어렵게 만들기 떼문이다. 전향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정면으로 들어가지 못 하면 돌아서 가야 한다. 그런데 돌아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공팔은 등고선이 촘촘하다. 아래 폭이 좁다. 산이 가파르고 넓이가 작으니 수비 하기는 매우 유리했다. 측면을 공격 해도 고지에서 내려다 보면 방어선 안쪽에 다 포함되는 상황이다. 결국 더 멀리 우회 침투를 해야 한다. 특공대가 필요했다. 대규모 병력을 이동 시키면 광고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정확하고 빠른 기습에 맞는 규모의 부대가 필요했다. 인원은 두 개 소대로 결정됐다. 중대를 둘로 쪼갰다. 두 개 소대는 우회 침투를 하고, 나머지 두 개 소대는 타 중대의 결원 보충에 포함됐다. 특공대는 작은 능선 두 개를 넘어 적의 우 측방을 타격 하기로 했다. 그 특공 임무에 자원을 했다.우회 침투조가 출발 하면서 연대는 하룻동안 고지 좌측 공격을 시작했다. 기만 전술이다. 적도 고지의 좌측에 수비를 집중했다. 고지 능선이 완만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니 만큼 수비와 공격이 집중되는 곳 이었다. 우회침투가 성공 하기 전 까지 인원 손실을 최대한 줄이면서 적으로 하여금 좌측 능선이 주공인 것 처럼 보여야 했다. 포격과 병행해서 공격 한다면 적은 더 쉽게 속을 것이다. 모두 우회 침투의 성공 확률이 높을 것으로 예상했다. 특공대는 백석과 사공팔을 잇는 능선의 두 번째 봉우리 아래 도착했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부대는 산을 올랐다. 팔십 명의 부대원이 쥐도 새도 모르게 능선을 넘어야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군을 만나서도 안되고 적군을 만나서는 더더욱 안된다. 작전은 간단했다. 정해진 시각에 고지의 우측 참호를 점령한다. 신호탄으로 알린다. 한 개 대대병력이 지원을 온다. 그때까지 참호에서 버티면 된다. 지원 온 대대병력과 함께 적을 고지 중심으로 몰면 된다. 오른쪽이 무너진 적은 아래에서 공격하는 본대의 타격에 결국 후퇴 하거나 항복 하게 된다.
부대를 출발 시키기 삼십 분전. 하사 한 명과 병사 둘을 먼저 출발 시켰다. 다시 십분 뒤에 한 개 분대를 출발 시켰다. 마지막으로 부대 전체가 이 열로 출발했다. 하룻동안의 산행 이었다. 멀리 포탄의 폭발음이 들려왔다. 총 소리가 들렸다. 빨라지는 발 걸음을 겨우 눌렀다. 약속된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 먼저 도착해도 어렵게 되고 너무 늦어도 어렵게 된다. 속도를 조절해서 하룻동안 약속된 장소로 가야 한다. 여름의 초입이었다. 한국의 초여름은 건조하다. 말라 비틀어진 흙더미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소총이 거추장스러웠다. 탄입대에 매 달린 수류탄도 거추장스럽다. 군화 속 양말에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 낯설게 들려오는 포탄 소리를 목표로 한 걸음씩 움직였다. 반나절이 지났다. 해가 산 머리 끝에 걸렸다. 약속한 시간에 잠시 행군을 멈추고 주머니에 든 주먹밥을 꺼냈다. 밥에 소금을 뿌려 종이로 싼 주먹밥 이다. 이 밥이 마지막이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이면 작전이 시작된다. 전투를 코앞에 두고 한가로이 밥을 먹을 수 없으니 지금 먹는 밥이 마지막 밥이 되는 셈이다. 밥을 반쯤 삼켰을 때 앞에서 따발총 소리가 들렸다. 북한군의 주력 기관총인 따발총은 우리의 카빈 소총과는 소리가 다르다. 71발들이 탄창을 사용하는 따발총은 살상력이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무차별적 지양사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총 소리에 놀란 부대원들이 경계태세를 취했다. 소대장을 불렀다. 양쪽에 시야 확보가 용이한 지점을 선택해 인원을 배치 하라고 명령했다. 나무를 잘 타는 대원을 골라 망원경을 줘서 올려 보냈다. 교차사격과 일제 사격 시 탄환의 낭비를 하지 않도록 대원들의 위치를 조정했다. 이 곳에서 탄환의 소모가 많으면 곤란 하다. 정작 싸워야 할 곳은 사공팔 고지였다. 무전병을 옆에 끼고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십 분쯤 지났을 무렵 앞서 출발했던 분대원들이 귀환했다. 적의 규모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무 위에 올라간 병사가 이십분 거리에 인민군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나무가 우거져 정확한 규모는 예상하기 어렵다는 보고였다. 망원경을 건네 받았다. 렌즈 너머로 적이 얼핏 보였다. 적은 조심스럽게 전진하고 있었다. 중대 규모로 예상된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규모의 적과 만났다. 내가 하는 생각을 상대방도 하고 있다는 것은 전술의 기초다. 우리의 우회공격과 마찬가지로 중대 규모의 적이 아군 본부를 기습공격하기 위해 백석에서 출발 한 것으로 예상 됐다. 탄 분배를 모두 마쳤다. 이동 중에 적을 만나면 전투는 난전이 되기 쉽다. 특히 시야 확보가 어려운 산악지형에서는 전투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대열이 흐트러지거나 저지선이 무너지면 결국 육탄전이다. 이런 경우에는 총성이 멈춰야 승,패를 확인 할 수 있다. 착검을 지시했다. 우리는 후퇴할 곳이 없다. 연대장에게 무전을 넣었다. 이번 작전은 실패다. 이 전투에서 이겨봤자 사공팔의 우회 공격은 실패 한 셈이다. 적과 조인 했다는 보고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욕이 들렸다. 거기서 뒈지든 살아서 기어 나오던 알아서 하라고 한다. 이해는 간다. 만일 내가 사단장이라면? 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공팔 고지에 발이 묶인 것이 벌써 며칠째인가? 간단한 몸풀기로 시작한 작전이었다. 발을 빼지도 더 들이 밀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지부진한 사공팔을 포기하고 백석으로 바로 갈 수도 있다. 백석을 바로 점령하면 사공팔은 가치를 잃게 된다. 거점을 하나씩 점령하지 않고 목표지점을 바로 타격하는 전략이다. 적을 배후에 두고 중요 목표를 공격하는 전술이다. 거점 확보에 따르는 손실을 줄이고 힘을 한 방향에 집중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거점을 수비하던 방어병력은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어 버린다. 만일 이 작전이 시행 된다면 낙동강 오리 알은 우리 특공대가 될 것이다. 젠장. 이제는 자력으로 본대와 합류해야 한다. 본대는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전쟁은 작전에 실패한 부대를 기다려 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산발적인 교전으로 시작을 알렸다. 이어서 적의 본대가 합류하자 제법 교전의 규모가 커졌다. 적은 숫적 우위에 중화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병력과 화력에서 절대 열세였다. 빗발치는 총알 속에 쓰러지는 아군의 숫자가 늘었다. 적은 우직하게 밀고 들어왔다. 어차피 예상하던 작전을 실패 한 것은 우리나 저쪽이나 마찬가지였다. 양쪽 다 원하지 않은 적을 만났고 원하지 않은 교전에 휘말렸다. 이 경우 가장 좋은 선택은 서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체 퇴각하는 방법이다. 이 곳에서 쓸데없이 병사와 탄약을 소모를 할 필요가 없다. 형식적인 교전과 퇴각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그런데 적은 인민군이다. 국군을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인민군이다. 우리는 국군이다. 인민군 이라면 이를 갈고 덤비는 국군이다. 결국 양쪽은 의미 없는 전투를 끝까지 마쳐야 한다. 상대는 숫자와 화력에서 앞서니 적당한 선에서 전투를 끝낼 생각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산을 내려가 출발지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적을 우리 앞마당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적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적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후퇴하기로 했다. 이선 엄호와 일선 후퇴를 시작했다. 삼선이 엄호하면 이선이 후퇴했다. 부상을 당한 아군은 버려야 했다. 산악에서의 근 접전 이다. 부상병 한 명을 살리려고 두 명의 아군을 희생시킬 수 없다. 눈 앞에서 쓰러지는 아군을 바라보며 후퇴를 했다. 적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적은 우리 중앙을 집요하게 타격했다. 상호 교전거리가 무척 가깝다. 나무와 돌이 없다면 마주보고 장기도 둘 거리였다. 적의 한 개 분대가 우리 중앙을 돌파했다. 결국 부대는 둘로 갈라졌다. 이제 퇴로가 막혔다. 양 몰이에 갇힌 신세다. 앞으로 엉키고 설키는 혼전이 될 것이다. 무전병을 불렀다. 포대 통신을 열었다. 좌표를 알려줬다. 이제 죽으려면 같이 죽는 길만 남았다. 일제 포격을 요청했다.
적이 우리를 에워싸는 속도가 빨라졌다. 부대원들이 쓰러져 나갔다. 무전병도 내 곁에서 즉사했다. 소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다가갔다. 빠져 나가라고 했다. 그는 이대로 도망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낮다고 했다. 그때 멀리서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주문한 물건이 도착하는 모양이다. 흙먼지가 일었다. 귀가 멍멍했다.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땅이 흔들렸다. 숨쉴 틈을 주지 않고 포탄이 날아들었다. 기운이 빠지고 의식이 사라졌다. 암흑이었다. 완전한 암흑이었다.
*
빗방울에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렵다. 눈을 깜박여 보지만 시야를 확보하기엔 역부족이다.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는지 모른다. 반나절? 아니면 하루?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주변 상황을 확인할 수 없다. 그냥 누운 체 하늘만 본다. 발소리가 들린다. 오른쪽이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누군가 지나간다. 빗물 때문에 사람의 형태가 일렁인다. 소매로 눈을 닦는다. 군복이 눈에 들어온다. 서 있는 상대도 나를 본다. 인민군복이다. 서로 뚫어지게 바라본다. 놈은 놀란 표정이다. 내가 잘못 본건 아닌지 확인하는 표정이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흙과 돌을 잡히는 대로 쥐고 던진다. 놈도 상황을 인지했는지 나에게 달려든다. 놈이 가슴에 올라탄다. 놈은 몸이 자유롭다. 나는 쉽게 제압당한다. 주먹이 날라 든다. 다행히 때리는 주먹질이 어설프다. 양손을 이용해 놈의 주먹을 막는다. 빗나가는 주먹이 더 많다. 간혹 방어하는 손을 비켜서 날아오는 주먹이 얼굴에 맞는다. 아프지만 견딜만하다.
“간나 새끼.”놈은 연신 간나 새끼를 연발한다. 주먹질이 제대로 된 효과를 못 보니 화가 치민듯하다. 나는 기회를 엿본다. 불리한 조건에서는 한번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 놈은 주먹질을 정확하게 하려고 몸의 중심을 앞으로 기울인다. 기회가 왔다. 놈의 머리채를 잡는다. 머리채를 당기면서 면상에 제대로 된 주먹을 날린다. 주먹은 이렇게 쓰는 거라고 가르쳐 주고 싶다. “억.” 짧은 비명과 함께 놈이 뒤로 나자빠진다. 주먹의 느낌으로 볼 때 놈은 제대로 충격을 받았다. 짜릿하다. 쓰러졌던 놈이 일어난다. 그렇지. 주먹질 한번에 사람이 죽지 않는다. 놈이 이번에는 발길질을 한다. 다행히 비로 인해 땅이 미끄럽다. 발길질이 약하지만, 그래도 전투화에 맞으면 꽤 아프다. 빗나간 전투화 바닥이 얼굴을 쓸고 간다. 쓰라리다. 이번에는 전투화 코로 얼굴을 찬다. 손으로 막는다. 막는 손이 아프다. 다음 발길질에 관자놀이 바로 위를 맞는다. 정신이 멍 하다. 얼굴을 몇 번 가격하던 놈이 이번에는 가슴팍을 밟는다. 얼굴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숨이 턱 막힌다. 가슴은 얼굴보다 넓어 방어하기 어렵다.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당할수는 없다. 다시 기회를 노린다.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지니 놈의 경계는 허술하다. 단순히 밟는 동작이다. 밟는 속도에 패턴을 발견한다. 손으로 가슴을 방어 하면서 속으로 숫자를 센다. 놈이 발을 들어 올린다. 하나. 둘. 놈의 바짓단을 잡는다. 힘껏 바짓단을 끌어 당긴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놈이 뒤로 나자빠진다. 넘어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린다. 충격이 큰 모양이다. 팔꿈치를 땅에 딛고 몸을 일으킨다. 고개를 빼고 놈을 확인한다. 놈은 쓰러져 일어나지 않는다. 죽었나? 아니다. 정신을 차리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몸을 일으킨 놈이 한번 비틀거린다. 정신을 온전히 차리면 놈은 다시 공격을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딱히 할게 없다. 그냥 놈을 기다린다. 놈은 뭔가를 찾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놈은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옷 소매로 눈을 닦는다. 흐렸던 시야가 맑아진다. 놈이 다시 시야에 들어온다. 놈의 손에는 착검된 카빈 소총이 들려있다. 맞다. 우리는 전투 중 이었다. 놈과 나는 군인이다. 놈이 소총을 거꾸로 쥐고 들어 올린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벌린 입술 사이로 굳게 다문 이가 보인다. 나는 양손을 모은다. 본능이 꿈틀 거린다. 놈은 들었던 총으로 나의 가슴 쪽을 찌른다. 한번에 끝낼 수 있는 상황이다. 손을 뻗어 총을 잡아야 한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 총구와 단검의 손잡이 부위가 잡혔다. 천운이다. 정말 천운이다. 놈의 힘을 버틴다. 놈이 흠칫 놀란다. 이것으로 싸움이 끝날거라는 예상이 빗나갔을 것이다. 내가 버티자 놈이 몸으로 소총 개머리판을 누른다. 칼 끝이 서서히 가슴께로 내려온다. 아무리 버텨봤자 몸으로 누르는 힘을 이길 수 없다. 칼 끝이 가슴에 닿는다. 칼은 조금씩 살을 파고 들 것이다. 그리고 흉곽을 뚫는다. 갈비 사이를 지나 늑간근을 찢어 놓을 것이다. 흉강으로 들어온 칼은 심장이나 허파를 찌르겠지. 잘하면 한번에 절명 하겠지. 운이 나쁘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고통 속에 서서히 죽을 것이다. 놈을 바라보는 동공은 최대한 확장 되고 코로 들이쉬는 숨은 허파에서 새어 나와 횡경막을 압박하겠지. 혈압이 올라 머리에는 뇌 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를 물고 있는 놈의 눈과 마주친다. 나는 총구를 쥐고 있는 손을 크게 흔든다. 동시에 몸을 살짝 비튼다. 칼 끝이 한쪽 겨드랑이를 찢고 땅 바닥에 박힌다. 놈의 공격이 빗 나갔다. 놈은 총을 뒤로 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검 손잡이 뒤에 있는 고정장치를 푼다. 총과 칼이 분리된다. 서로 당기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놈이 뒤로 나자빠진다. 갑자기 웃음이 난다. 사지가 멀쩡한 놈이 반신불수를 제대로 이겨먹지 못하고 있다. 큰 소리로 웃는다. 온 산이 떠나가라 웃는다. 너무 크게 웃었는지 기침이 난다. 웃음만큼 기침도 심하게 올라온다. 기침 사이로 피가 묻어 나온다. 폐나 기관지에 출혈이 있는 모양이다. 놈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 내 손에 칼이 있다. 몸을 일으킨다. 허리의 통증을 참고 최대한 몸을 일으킨다. 느리게 움직이는 놈이 보인다. 칼을 던져볼까? 제대로 맞히면 한번에 죽일 수 있다. 하지만 확률이 낮다. 부정확한 자세로 던진 칼이 놈에게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정확하게 날아가진 않는다. 칼을 던지는건 도움이 못 된다. 허리춤에 칼을 넣어둔다. 놈은 다시 일어나면 다른 형태의 공격을 할 것이다. 그 공격에 맞는 방어를 해야겠지? 하루 종일 이러다 보면 전쟁이 끝나있을까? 지리하게 이어지는 전쟁만큼이나 놈과의 싸움을 얼마나 지리하게 끌 수 있을까? 몸을 일으킨 놈이 소리치며 접근한다. 독이 잔뜩 올랐다.
“이. 간나 새끼를.”내 가슴에 총구를 들이민다. 이번에는 다르다. 방아쇠에 놈의 손가락이 걸려있다. 한번에 깔끔하게 끝낼 방법을 이제 알아채다니 멍청한 놈. 놈이 겨눈 총구를 손으로 잡는다. 흔히 총구를 들이대면 상대는 손바닥을 하늘로 펼치고 항복의 표시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반적인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 놈의 눈이 동그래진다. 놀란 모양이다. 죽는 마당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 놀란 것일까? 아니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담담한 반응에 기분이 나쁘겠지. 총구를 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인다. 나는 총구를 이마로 옮긴다. 한번에 끝내자는 생각이다. 단 한번에 끝내자. 놈은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는다. 갈등할 필요가 있는가?
“쏴.”낮고 무겁게 말한다. 놈은 여전히 주저한다. 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 얼굴이다.“쏴라.”더 큰 소리로 명령한다. 주저할 필요 없다. 힘 드는 것도 아니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이면 된다. 그리고 놈은 훌훌 털고 자기 부대를 찾아가면 그만이다. 나는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다. 일일이 숫자를 세지 않을 거라면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다. 나는 전쟁 중에 희생된 몇 만 명 중 한 명일 뿐이다. 놈은 전쟁 중에 살아남은 몇 만 명 중 한 명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정도로 생각하면 간단하다. 놈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교차한다. 서로 말없는 시간이 길어진다. 여전히 놈은 머뭇거린다.“쏘라고. 쏘란 말이야.”더 크게 소리친다. 모든 힘을 모아 소리친다. 메아리가 길에 울린다. 놈이 놀라 주저 앉는다. 기침이 난다. 피가 묻어 나온다. 비가 얼굴을 때려 눈 뜨기 힘들다. 눈을 감고 기침을 한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비가 달다.
눈을 뜬다. 강한 햇빛에 눈을 뜬다. 하늘높이 뜬 해가 그만 자라며 나의 눈꺼풀을 끌어 올린다. 소매로 해를 가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주위를 둘러본다. 오른쪽. 왼쪽. 아무것도 안 보인다. 어찌된 영문이지 모르겠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꿈을 꾼 기분이다. 팔꿈치로 땅을 버티고 몸을 일으킨다. 아랫도리에 얼굴을 묻은 채 죽은 소대장이 보인다. 옆에 놓인 카빈 소총도 보인다.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안 보인다. 소총을 잡기 위해 손을 뻗는다. 조금 모자란다. 몸을 쭉 뻗고 안간힘을 쓴다. 근육을 최대한 늘인다. 땅바닥에 닿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허리 통증은 무시한다. 손가락 끝에 소총의 멜빵이 닿는다. 조금만 더. 힘을 더 준다. 멜빵이 손가락 끝에 닿는다. 끙. 신음소리가 난다. 그때 전투화가 나타나 발길질로 총을 걷어찬다. 놀라서 위를 쳐다본다. 놈이다. 놈이 해를 가린 체 아래를 내려다 본다. 서로 눈이 마주친다. 놈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렵다. 놈을 바라보며 주위를 더듬는다. 손에 잡히는 돌멩이 하나를 쥔다. 놈이 공격한다면 돌멩이를 던져볼 생각이다. 놈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 하나를 가슴께 던진다. 나는 움찔거리며 놀란다. 가슴을 바라본다. 물건은 피로 얼룩진 종이에 쌓여있다. 놈과 물건을 번갈아 바라본다. 놈이 옆에 앉는다. 놈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놈은 나를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들고 있던 돌멩이가 무안하다. 시선을 놈에게 고정한 체 슬며시 돌을 내려 놓는다. 가슴의 물건을 집는다. 종이를 벗긴다. 소금에 절인 주먹밥 이다. 밥알 사이로 핏덩이가 보인다. 주먹밥을 보다 놈을 쳐다본다. 옆에 앉은 놈도 종이를 벗겨 주먹밥을 꺼낸다. 놈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한입 베어 문다. 앞을 바라보며 주먹밥을 씹던 놈이 고개를 돌려 말한다.
“먹어라. 살고 싶으면 먹어라.”그리고 다시 주먹밥을 베어 문다. 나도 놈을 따라 주먹밥을 베어 문다. 피비린내가 입안에서 진동한다. 인상을 쓴다. “기것도 고맙다 하라우.”놈이 타박을 한다. 놈을 쳐다보며 씹는다. 목이 말라있어도 참고 삼킨다. 기침이 나온다. 밥 알이 튄다. 놈이 수통을 내 민다. 수통을 받아 물을 마신다. 갈증이 달아난다. 수통을 놈에게 건넨다. 주먹밥을 먹는다. 비린내에 익숙한지 냄새가 역겹지 않다. 서로 말이 없다. 놈은 앞 산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놈이 일어난다. 나는 본능적으로 꿈틀거린다. 놈의 눈치를 보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다. 단검 손잡이가 만져진다.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놈은 감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느낌이 온다. 싸늘한 기운이다. 놈이 아랫도리 근처로 온다. 놈을 따라 긴장의 끈을 조인다. 놈은 죽은 소대장의 어깨를 잡기 위해 몸을 숙인다. 이때다. 몸을 일으켜 놈의 멱살을 잡아 끈다. 허리춤의 칼을 빼 놈의 목젖에 겨눈다. 기선을 제압했다.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눈동자에 힘을 준다. 콧김이 거칠어진다. 꽉 다문 이 사이로도 거친 숨이 베어 나온다. 서로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딧힌다. “찌르라.”놈은 눈 한 번 깜빡 거리지 않는다. 무덤덤한 말투다.“찌르라.”다시 놈이 요구 한다. 목을 찌른 칼끝에 피가 보인다. 놈은 내가 찌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놈이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총을 쏘라는 나의 외침이 기억의 창고에서 메아리친다. 놈이 칼을 든 손을 잡는다. 나는 순순히 칼을 거둔다. 칼을 떨어뜨리고 눕는다. 허리의 통증이 심하다. 그는 소대장을 끌어서 옆으로 걷어낸다. 묵직한 뭔가가 사라지는 느낌이 난다.“살으라. 인제는 꼭 살으라.”그는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슨 말인가 싶다. 그는 설명을 계속한다.“저 고지가 어느 쪽으로 디러 갔는지 모르갔지만, 우리가 살라면 둘 다 살아야 한다.” 국군에게 발견되던 인민군에 발견되던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첩첩 산중에서 발견된 포로 한 명 사살하는 건 죄도 아니다. 사살 이랄 것도 없다. 그냥 맞아 죽기 딱 좋다. 국군에 발견되면 내가 살아 있는 게 놈에게 도움이 된다. 인민군에 발견되어도 마찬가지다.
“내래. 김헌태야.”그는 자신의 명찰을 손으로 짚으며 말한다. 이번에는 허리를 숙여 내 명찰을 확인한다.“리... 영우?”그는 명찰을 확인하고 군복에 달린 계급장을 만지작거린다.“중대장 이구만.” 그가 가리킨 자신의 계급은 하사관이다.“쫄빙은 아니니끼리 말은 통 하겠구만.”그는 자신의 생각을 혼잣말처럼 던져놓고 주변을 분주히 돌아다닌다.“어쩔 셈인가?” 그는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에 열심이다.“어쩔 셈인가?”다시 소리 높여 묻는다. 그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다가온다. 내 얼굴 가까이 그의 얼굴을 들이민다.“살아야 하디 않칸? 살라면 움딕여 야지.”“내 상태는?”궁금한 내 상태를 묻는다. 허리 아래의 감각이 없다. 볼 수 없으니 도움을 구하는 수 밖에 없다. 그는 나의 아랫도리를 바라본다. “내래 의사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디만, 한쪽 다리가 완뎐히 돌아갔구만 기래.”그의 대답은 감정이 없다. 간을 하지 않은 대답은 다행히 나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다. 한쪽다리가 돌아갔다? 허리가 부러졌나? 나도 그의 태도만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하던 일을 계속한다. 여기저기 다니며 시체를 뒤진다.“주먹밥이 몇 개 읍서.”그는 누군가의 전투복을 벗겨 모아둔 주먹밥을 싼다. 다시 누군가의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갑을 꺼내온다.“피우네?”담배를 권한다. 받아 든다. 그가 불을 붙여준다. 그리고 자신도 담배를 입에 문다. 얼마만의 담배인가. 나는 담배를 깊이 빤다. 기침이 나온다. 처음 피우는 담배도 아닌데 기침이 심하게 난다.“괜찮네?”그의 물음에 손짓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한다. 기침이 잦아들자 다시 담배를 빤다. 연기를 길게 뱉는다. 파란 하늘 사이로 흰 담배연기가 흩어진다. 그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소대장의 시체를 끌고 온다.“뭐. 뭐 하는 건가?”“기냥 있어 보라.”그는 내 뒤에서 나를 반쯤 일으킨다. 끙. 허리 통증이 심하다. “도금만 참으라.”나의 등을 자신의 엉덩이로 받힌다. 소대장의 시체를 내 등뒤로 끼워 넣는다. 시체를 등받이로 사용하라는 의미다. 고인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한결 편하다. 시야도 확 트인다. 그가 담배를 끈다. 몸을 옮겨 시체에서 벗긴 전투복을 내게 던져준다. 단검으로 찢어 긴 끈을 만들라고 한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포탄에 잘려나간 나뭇가지를 뒤진다. 튼실해 보이는 나무를 몇 개 가져온다. 내가 자른 끈과 전투복을 이용해서 들것을 만든다. 그는 들것을 두드린다. 이리저리 재 본다. 들것이 튼튼한지 확인한다. 그는 다시 이런저런 물품을 뒤져 전투복 하나에 담는다. 나는 그의 행동을 바라본다. 그는 빈 전투복 몇 벌과 봇짐 두 개를 들것에 싣고 고정시킨다. 이번에는 들것을 내 옆에 둔다. 내 어깨 아래에 손을 넣고 일으킨다. 허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온다. 견딜 수가 없다. 그의 팔을 뿌리친다. 그가 나를 놓치며 뒷걸음 친다.“미안하다.”그를 똑바로 볼 수 없다. 그는 말없이 나를 굴린다. 끄는 것보다 굴리는 게 훨씬 편하다. 어쨌든 나를 들것으로 옮겨야 했다. 마지막으로 카빈 소총과 총알을 챙긴다. 사용 할 곳이 없을 것 같지만, 군인 의 본능이다. 그는 남은 끈을 들것에 묶는다. 자신의 어깨를 전투복으로 보강한다. 그가 끈을 어깨에 걸치고 들것을 끈다. 움직이지 않는다. 쉽게 움직일 들것이 아니다. 그는 다시 힘을 준다. 들것이 천천히 끌린다. 덜커덕 소리와 나뭇가지 끌리는 소리가 난다. 몇 걸음 옮기다가 멈춘다.“이거이 보통 오려운 일이 아니구만 기래.”면목이 없다. 산에서 들것을 끌고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 도움도 못되고 있다. 그는 줄의 길이를 조절 한다. 적당한 길이를 확인하고 다시 들것을 끈다. 두 번의 시도 끝에 들것이 끌린다. 그는 들것을 끌며 산 정상으로 향한다.“어디로 가는가?”“낸들 어케 알간? 여기가 웨딘지 모르는데 어디로 갈지는 어케 알간.기냥 가는 고이지.” 그의 대답에 나는 주머니를 뒤진다. 지도를 찾는다. 현재 위치를 알면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지도가 보이지 않는다. 교전중에 분실이 되었거나 포격에 사라진 모양이다.“잠깐.”문득 생각이 나는 게 있어 그를 세운다. 그가 멈춰서 나를 바라본다.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고 손목 시계를 맞춘다. 어디론가 가야 한다면 남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북쪽은 백석고지다. 지금 누구 수중에 있을지도 모를 고지를 향해 가는 것은 도박이다. 남쪽은 확실하게 국군 지역이니 남쪽으로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그에게 남쪽 방향을 가리킨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한다. 남쪽 정상을 향해 들것을 끈다. 산 정상으로 가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기 쉽게 노출 시키기 위함이다. 산 위로 들것을 끄는 것은 더 힘들다. 그는 한번 끌 때 마다 힘을 다한다. 오늘 안으로 산 위로 올라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저녁이다. 어둠은 우리에게 쉬라고 말한다. 그가 주먹밥을 꺼낸다. 반으로 자른다. 아껴 먹어야 하니 저녁에는 반만 먹기로 한다. 나는 사양한다. 그가 괜찮으니 먹어 두라고 한다. 한 것도 없이 밥만 축내는 게 미안하다. 힘을 써야 하는 그에게 나머지 반을 양보한다. “동무는 고향이 오디래?”주먹밥 대신 담배를 입에 문 내게 묻는다.“서울.”“서울?”“그래 서울.”“간나 좋은데 살았구먼.”“그래 좋은데 살았지.”말끝에 한숨이 묻어 나온다.“집 애기 한번 해보라 우.”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의사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신식 교육을 받으셨다. 개화에 관심이 많으셨다. 당연히 아버지와 큰 아버지도 신식 교육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의사 공부를 마치고 서울에서 개업하셨다. 큰 아버지께서는 부산에서 장사를 하셨다. 나는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해방이 되고 바로 군에 지원했다. 1949년에 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군 장교가 되기 위해서다. 1950년 동란이 발생했다. 포천방어 임무를 맡으면서 소위로 임관했다. 포천에서 많은 동료가 죽었다. 운이 좋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인민군에 속절없이 밀렸다. 서울을 내주고 낙동강까지 밀렸다. 집은 부산의 큰 아버지 집으로 피난 갔다.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중대장까지 올랐다. “부르주아 구만.”그가 빈정댄다.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뱃가죽에 기름이 잔뜩 끼었다고 대답한다. 계층이 존재 한다면 당연히 지배계층과 피 지배계층으로 나뉜다. 재산으로 따지면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는 그게 불합리 하다고 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 그런 꿈 같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래서 북한이 그 꿈 같은 사회가 되었는지 묻는다. 기득권층을 뒤엎어서 뭐가 달라지는지 묻는다. 평등? 기득권의 잘못은 심판의 대상은 될 지라도 사회의 근본 구조를 뒤집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나의 말에 그는 반박한다. 그는 지금 북조선의 개혁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 전쟁도 핍박 받고 억압 받는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전쟁 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 많은 젊은 이 들이 죽어 나갔다. 그 젊은이가 흘린 피의 대가가 지금 무어냐고 묻는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던 그 선택의 결과에 따르는 책임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단지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거나 언젠가는 좋아 지겠지 같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 책임을 희석 시키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젊은 희생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내 말을 회피한 체 담배를 문다. 완전한 세상이 있으면 나도 좋겠다고 마무리한다. 피곤하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진 듯하다. 다른 생각과 시선을 가진 두 사람의 이야기는 평행선이다.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대화다. 이번에는 그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 그는 내일 이야기 하자며 회피한다. 잠을 푹 자두라고 덧붙이며 눕는다.
다음날 새벽부터 들것을 끌어 올린다. 선선한 시간에 최대한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가 끌고 나는 응원을 한다. 해가 뜨고 기온이 오른다. 초여름 날씨답지 않게 햇살이 따갑다. 해가 중천에 뜰때 겨우 산등성이 위로 들것이 올려진다. 우리는 웃는다. 뭔가 하나 해 냈다는 기쁨이다. 주먹밥이 상하고 있다. 그는 주먹밥을 다 먹자고 한다. 시체에서 가져온 주먹밥이 온전 할 리 없다. 상하기전에 입 속에 우겨 넣는다. 밥을 씹으며 혹시 포연이 이는 곳이 있는지 돌아 본다. 조용하다. 전쟁 중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혹시 휴전이 되었나? 아니 갑자기 휴전 될 리가 없다. 그가 카빈 소총을 어깨에 걸친다. 하늘을 겨눈다.탕.짧고 강한 소리가 울린다. 총소리에 놀란 새 몇 마리가 하늘로 난다. 맞은편 산도 총을 쏜다. 맞은편에도 새 몇 마리가 튀어 오른다. 옆에 있는 산도 총을 쏜다. 그쪽 새도 놀란다. 메아리가 잦아든다. 누군가 총소리를 들으면 이곳을 확인 할 것이다. 그와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당연히 반응은 없다. 총소리가 난다고 다른 곳에서 총을 쏠리 없다. 그가 다시 총 한발을 쏜다. 이번에도 메아리가 길게 울린다. 그는 장전을 풀고 내게 총을 건넨다. 그는 들것을 끈다. 산 등성이라 끌기 쉬운 모양이다.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걷는다. 햇볕이 강해진다. 나도 말없이 앞만 바라본다. 한참을 쉬지 않는다. 그가 갑자기 발을 헛딛는다. 휘청이며 그가 옆으로 쓰러진다. 산 아래로 미끄러진다. 풀밭으로 넘어 지면서 계속 미끄러진다. 들것이 그를 따라 미끄러진다. 나는 손에 힘을 준 채 눈을 감는다. 우리는 풀밭 아래로 빠르게 미끄러진다. 풀잎이 튀고 돌맹이가 튄다. 들것 아래로 돌 부리들이 부딪힌다. 등이 찢어져 나갈것 같다. 그는 쥐고 있던 끈을 놓는다. 들것의 속도가 줄어든다. 빙글빙글 돌아간다. 하늘도 같이 돈다. 끝없이 미끄러질것 같다. 들것에 실은 봇짐들은 이미 튕겨져 나갔다. 아랫도리가 속절없이 흔들린다. 속도가 줄던 들것이 나무기둥에 부딪히며 멈춘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들것이 멈추자 입에서 신음이 올라온다. 고통스럽지만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 숨 쉬기도 불편하다. 나무에 부딪히면서 갈비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그는 한참을 더 미끄러지다 멈춘다. 그도 신음 소리를 낸다. 겨우 몸을 일으켜 내게 기어온다.
“동무 괜찮아?”나의 안부를 묻는다. 나는 숨을 껄떡이며 그를 바라본다. 그의 상태도 온전하지는 않다. 그의 왼손 약지가 너덜거린다. 새끼 손가락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빛으로 그의 손을 가리킨다. 그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들여다 본다. 낄낄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그가 덜렁거리는 약지를 흔들어 보인다. 부러진 뼈가 살짝 드러나 보인다. 그러다 손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른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도 비명을 지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숨 쉬기도 어렵다. 그는 한참을 웅크린 채 고통스러워 한다. 쇼크가 올 수도 있다. 남아있는 약지도 떨어져 나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는 비명의 끝을 신음으로 마무리한다. 잠시 통증이 가셨는지 일어선다. 한쪽다리를 절룩인다. 아니 제대로 땅을 짚지 못한다. 그는 깡총걸음으로 떨어진 빈 전투복을 수거해 온다. 나는 전투복을 길게 찢어준다. 그가 손을 동여맨다. 그가 잡동사니가 든 봇짐을 찾아온다. 풀어 헤치니 약품이 보인다. 의무 병 시체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모르핀을 꺼낸다. 허벅지에 찌른다. 나를 보며 눈짓한다. 나는 동의한다. 모르핀의 약효가 번지자 통증이 가신다. 그는 다리를 절뚝이며 물건을 회수한다. 부러진 들 것은 적당히 수리한다. 이 상태로 얼마나 더 갈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가 산 위로 들것을 끌어 올린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더 힘겹다. 게다가 풀 밭이라 미끄럽다. 간간히 욕을 해댄다. 간나 새끼라고 한다. 이젠 내가 미울 것이다. 처음 생각과 다르게 짐짝처럼 느껴질 것이다. 저녁 무렵에야 겨우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탈진한 그가 내 옆에 눕는다.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가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고향은 함경도였다. 작은 땅을 개간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평민 집안 이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재산을 모두 파셨다. 서울로 가면 잘 먹고 잘 살수 있다는 믿음에 가산을 모두 정리하셨다. 온 가족이 모두 서울로 왔다. 땅만 파먹고 살던 사람이 서울 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딱히 할게 없었다. 가진 돈을 모두 주고 가게 한 칸을 얻었다. 믿는 구석은 밥 가게였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음식 솜씨 덕분에 가게는 잘 됐다. 그럭저럭 먹고 살만했다. 할아버지는 가게 일을 돕고 아버지께서는 막일을 나가셨다. 안 밖으로 돈을 벌었다. 돈 버는 재미가 좋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의 징집령이 떨어졌다. 전쟁의 막바지였다. 일본은 전세가 불리하니 전쟁 물자와 사람까지 모두 쓸어갔다. 그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가야 할 징집에 아버지가 자기 대신 지원했다. 대는 이어야 한다면 일본 경찰에게 돈을 쥐어주며 사람을 바꿨다. 할아버지께서는 노동 봉사를 하셨다. 아버지가 이름없는 섬에서 죽고 조부모 모두 돌아가셨다. 홀어머니 아래서 해방을 맞았다. 다행이 밥집이라도 있어 굶지는 않았다. 해방은 혼란의 시대였다. 모든 게 바뀌는 시기였다. 그는 반민족청산에 가담했다. 반 민족행위자를 처단하기 위해 자생된 단체에서 활동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베어 있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다 1948년에 결성된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위원회 지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반민족 척결이 흐지부지되고 그는 어머니 가게로 돌아왔다. 그 무렵 집 근처에 군부대가 하나 들어왔다. 다행히 장사가 잘 되었다. 그러다 전쟁이 났다. 피난을 채 가지 못했다. 북진 중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철썩 같이 믿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인민군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군인을 상대로 밥을 팔았으니 자아비판 대상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살리는 조건으로 인민군에 들어갔다. 아버지를 끌고 간 일본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남한 정부에 대한 회의가 깊었다. 여기에 피난을 가지 못한 상황까지 발생했으니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깊었다. 약자니깐 민초니깐 항상 당하고만 살았다. 이제는 인민의 시대가 열린다는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인민해방은 그가 경험하지 모한 새로운 세계였다. 하지만 인민군의 행태에 가끔 회의를 느꼈다. 인민군 내에서도 배부른 사람은 따로 있었다. 평등을 외치지만 실제 평등하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이데올로기는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는 이야기 말미에 한마디 던진다.“어쩌면 동무랑 나랑 명동 같은 데서 한번 부디쳤슬 수도 있디 않같어?”그럴 것 같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았다. 어쩌면 한번 정도는 스쳐 지나 갓을 수도 있다. 내가 그의 어머니 밥집에서 밥을 먹었을 수 있다. 어쩌면 그가 아버지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 이었다.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그에게 보여준다. 여자와 아이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뉘기야?”“마누라.”“결혼 했어야?”그가 놀라서 묻는다. 대학 동창인데 사고로 아이를 만들었다고 터 놓는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다.“고 에미나이래 이쁘구만야.”그가 부러워한다. 그도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결혼 전이라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그에게 사진을 준다.“나. 가지라고?”줄게 사진밖에 없다고 한다. “기렇디. 고롬 나도 뭐 하나 줘야겠구만. 기래.”그도 내게 사진을 준다. 내 사진은 그의 품으로. 그의 사진은 내품으로 들어 온다. 부채질을 한다. 그는 달게 잔다. 가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다. 벌레가 극성이다. 그는 편하게 자야 한다. 쪽 잠을 청하며 부채질을 한다. 오늘은 달이 밝다.
아침을 굶었다. 그는 다친 발목에 나뭇가지로 부목을 댄다. 모르핀을 주사한다. 나에게 주사기를 건넨다. 사양한다. 모르핀도 몇 개 없을 것이다. 내가 거칠게 숨을 쉬는 것을 그는 안다. 그래도 나의 사양을 거절하지 않는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다. 내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총을 메고 산 아래로 내려간다. 절뚝거리며 산 아래로 사라진다. 넘어지면서 산 아래로 사라진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젠 혼자다. 그가 나를 버렸어도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는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했다. 바람이 분다. 기분이 좋다. 좋은 친구를 사귄 기분이다.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잠이 든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잔 티가 난다. 바람이 불어 나를 토닥거려 준다. 자장가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총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다시 총 소리가 들린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멀리 포연이 보이는지 확인한다. 눈에 가득 산 봉우리만 들어온다. 분명 그가 쏜 총이다. 단발로 두 번. 그가 아직 근처에 있다. 잠시 후 그가 다리를 절룩이며 나타난다. 모르핀의 약효가 떨어지는지 인상이 구겨진다. 그의 어깨에 맨 카빈 소총이 보인다. 그의 손에 뭔가 들려진 게 보인다. 그가 손을 들어 보이며 웃는다. 머리가 사라진 토끼다. 다른 손에든 팔뚝만한 칡뿌리를 들어 보인다. 그는 내 곁에서 칡 뿌리를 던진다. 나는 칡뿌리의 흙을 턴다. 단검을 이용해 칡의 껍질을 긁는다. 내가 칡을 다듬는 사이 그는 나뭇가지들을 모은다. 돌멩이를 주워 바람 막이를 만든다. 나뭇가지에 토끼를 꿴다. 껍질을 벗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냥 구워 먹으면 된다. 전투복을 불 쏘시개로 쓴다. 그가 토끼를 구우면서 웃음을 날린다. 나는 껍질을 다듬은 칡을 들어 보이며 웃는다. 토끼가 구워질 때까지 칡을 씹는다.들것이 거의 끌리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제안한다. 당신이라도 살라고 한다. 나를 버리면 당신은 살수 있다고 한다. 그는 들은 채도 안 한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들것을 끈다. 한 발짝 끄는데 한참이 걸린다. 다리도 온전하지 못하다. 모르핀도 이제 하나 남았다.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바뀐다. 들릴 듯 말듯한 신음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나는 그 신음을 받아 나의 고통으로 삼킨다. 나는 전투복을 뒤진다. 단검을 찾는다. 아까 칡을 다듬고 어디 뒀더라? 모르핀을 싼 봇짐에서 단검을 발견한다. 팔을 걷어 붙인다. 칼을 들고 손목을 긋는다. 들것이 흔들려 제대로 긋지 못한다. 피가 나온다. 그가 눈치를 챈다. 그가 욕을 하며 달려든다. 내게서 단검을 빼앗아 버린다. 나는 그에게 주먹을 날린다. 그가 나가 떨어진다. 손목에서 피가 많이 나온다. 그가 다시 쩔뚝거리며 다가 온다. 나는 주먹을 휘 두른다. 비명을 지른다. 그는 이 간나 새끼를 연발한다. 종 간나 새끼라고 크게 소리친다. 전투화로 나의 머리를 찬다. 그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하루가 지났다. 눈을 뜬다. 머리가 아프다. 정신을 차린다. 주위를 둘러본다. 담배 냄새가 난다. 그가 옆에서 담배를 핀다. 자해를 한 손목은 전투복 끈으로 감겨있다. 질기다. 참 질긴 생명이다. 들었던 고개를 내린다. 하늘을 바라본다. 그가 담뱃불을 붙여 내 입술에 물린다. 담배를 빤다. 기침이 올라온다. 부러진 갈비뼈도 아프다. 신음은 안 나온다. 이젠 고통에 익숙하다. 콜록거린다. 담배연기에 눈이 맵다. 입에 문 담뱃재를 그가 털어준다. 그가 허벅지에 마지막 모르핀을 주사한다. 그리고 말없이 일어선다. 어깨에 끈을 고정한다. 신음 소리와 함께 들것을 끈다. 느리다. 거북이도 이보다는 빠를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관심도 없다. 남쪽이 아니어도 좋다. 어디로 가는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냥 간다. 느리게 간다.“노래하나 불러 보라우.”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연다. 아는 노래가 뭐가 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군가? 그가 국군의 군가를 알까? 아니면 가요? 노래할 맛이 안 난다. 그냥 모른다고 했다. 먼저 불러 보라고 한다. 그도 고민을 한다. 산골 무지렁이가 아는 노래가 있을 리 없다고 한다. 혁명가 같은 노래 외에는 아는 게 없다고 한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그의 신음이 깊어간다. 끄는 걸음이 더 무거워 진다. 이대로 끈을 놓고 싶을 것이다. 문득 그의 입에서 가락이 흘러 나온다. 느리다. 힘에 겨워 느리게 가락이 흘러 나온다.
아리랑 아리랑아라리요~
나도 같이 부른다. 그가 힘든 만큼 나도 힘들게 부른다. 느린 가락으로 부른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강원도 산자락에 아리랑이 퍼진다. 그가 부르던 노래를 끊는다. 훌쩍인다. 입을 다물고 울음을 삼킨다. 하지만 코를 훌쩍이는 것은 숨기지 못한다. 그가 울고 나도 운다. 그는 걷는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망부석처럼 하늘을 본다. 그러다 몸을 돌려 소총을 찾는다. 그에게 총을 건네준다. 그가 하늘에 대고 총을 쏜다. 한 발. 메아리 친다. 다시 총을 쏜다. 한 발. 메아리 친다. 이번에는 연속으로 두발을 쏜다. 그리고 가만히 하늘을 본다.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나의 시야는 좁다. 그에게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갑자기 그가 총을 나에게 건넨다. 그리고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온전치 못한 다리를 끌며 빠르게 내려간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그를 부를 정신도 없다. 그가 산을 내려가다 한번 뒹군다. 다시 일어난다. “이봐. 이봐.”급히 그를 불러봐도 소용이 없다. 뒤도 안 돌아본다. 그가 빠르게 숲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기계음이 낮게 들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다. 빠르다. 소리가 빠르게 접근한다. 머리위로 뭔가 지나간다. 은색이다. 정찰기다. 몸체에 별 모양이 선명하다. 나는 소리를 지른다. 손을 흔든다. 지나간 비행기가 크게 선회를 한다. 나는 더 크게 소리 지른다. 비행기의 엔진 음이 내 머리위로 지나간다. 뒤통수로 사라진 비행기 소리가 다시 커진다. 한번 더 지나간다. 비행기는 동체를 움직인다. 날개를 흔들어 보인다. 나를 발견 했다는 신호다. 웃음이 나왔다. 비명도 질렀다. 갑자기 기운이 넘친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터져 나온다. 그러다 문득 그의 생각이 난다. 그렇다. 만일 비행기에서 인민군복을 봤다면 우리는 총알세례를 당했을 것이다. 그를 찾는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비행기가 사리지면 그가 다시 돌아 올 지 모른다. 주변을 둘러본다. 조용하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조용하다. 총을 집는다. 탄창을 끼운다. 총을 쏜다. 그를 부른다. 다시 쏜다. 다시 그를 부른다. 대답도 기척도 없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목을 길게 빼고 부른다. 분명 총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무엇이 무서운가? 무엇이 그를 도망가게 하는가? 적군에 대한 본능적인 움직임인가? 다시 총을 쏜다. 메아리만 길게 울린다.
미군 헬기가 도착한다. 나는 새 들것에 옮겨진다. 고맙다고 한다. 땡큐라고 계속 말한다. 헬기에 태워진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몸을 일으켜 돌리려 한다. 미군이 제지한다. 나는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인다. 몸을 돌리려 해 보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진통제 덕분에 힘을 쓴다. 꼼짝도 안 한다. 미군이 나의 생각을 알고 몸을 뒤집어준다. 나는 기어서 헬기의 끝에 고개를 내민다. 나무 들것이 바람에 날아간다. 나는 그가 아직 이 근처에 있다고 믿는다. 그의 모습을 찾기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나무가 우거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헬기가 이륙한다. 그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손을 흔든다. 그가 보라고 손을 흔든다. 그리고 크게 소리친다.“살아 있으라. 꼭 살아 있으라.”나의 목소리는 헬기의 소음에 묻혀 버린다.
*
인천공항은 여느 때 보다 더 붐빈다. 특히 연휴가 낀 휴일이면 발 디딜틈도 없다. 국민소득이 높아져 해외로 여행가는 인구가 점점 늘어났다. 몸을 이끌고 인천공항 39번 출입구 앞에 도착한다. 오늘 입은 옷은 지난번에 새로 산 양복이다. 두 벌을 샀다. 그 중 한 벌을 지금 입고 있다. 손녀가 휠체어를 끈다. 옆에는 아내가 따라온다. 아내 옆에 아들과 딸이 같이 온다. 39번 출입구 전광판에 비행기 도착 알림이 뜬다. 뉴욕에서 출발한 비행기다. 참 멀리 돌아왔다.
헬기에서 구조된 나는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지지부진한 전쟁에서 특별한 이야기 거리는 항상 필요했다. 정부는 국민과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구조된 나는 좋은 이야기 거리였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에서 사단 지휘부를 살린 영웅이 되었다. 목숨을 걸고 적 일개 대대를 섬멸하기 위해 일제 포격을 요청했다. 만일 적 대대가 우회하여 사단 사령부를 타격 했다면 양구. 화천. 철원 일대는 지금쯤 인민군의 수중에 있을 거라고 꾸며졌다.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부풀려 졌다. 게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몸으로 본대에 귀환하기 위해 산속을 헤맸다. 투철하고 강인한 군인의 표본이 되었다. 훈장을 받았다. 화려하게 전역했다.부산 큰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군수품을 납품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성공 했다. 전쟁 영웅이니 납품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열심히 일했다.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흘러 문득문득 지난 기억이 떠 올랐다.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먹고 사는 걱정이 없어지니 추억을 다시 찾고 싶어졌다. 그가 기억속에서 꿈틀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찾았다. 사실 그를 찾는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 이었다. 모두가 불가능 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정황상 그가 살아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한번 두번 과거의 기억을 꺼냈다. 그러다보니 그를 보고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눈으로 그를 확인하지 않아도 좋았다. 단지 그의 소식 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군인들의 뼈가 발견된 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산골을 뒤졌다. 군사지역을 빼고 다 뒤졌다. 유해 발굴단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뼈라도 찾고 싶었다.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났다. 일년이 지나고 몇 해가 흘렀다. 이제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나도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손녀가 제안을 했다. 혹시 모르니 거제 포로수용소의 기록을 뒤지기로했다. 모든 기록을 확인했다. 마지막 끈을 잡는 심정으로 포로 명단을 확인했다. 며칠간의 확인 작업 끝에 익숙한 이름 석자가 눈에 띄었다.
김. 헌. 태.계급: 하사나이: 28
생각지도 않은 일 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다. 살아서 포로가 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몇 번이고 들여다 봤다. 주름진 손으로 명부를 쓰다듬었다. 그의 이름을 쓸고 또 쓸었다. 포로명단을 부여잡고 울었다. 수 십년이 지났다. 그가 명찰을 보여주던 기억이 떠 올랐다. 명단을 기초로 그의 행방에 대한 기록을 확인했다. 정확한 한글로 ‘반공포로’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제3국 중에서 제3국을 선택했었다. 그의 행선지를 찾았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는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었다. 현재 생존해 있다는 연락을 지난 해 받았다. 바로 만나고 싶었지만 몸이 연로하여 한국 행이 미루어졌다. 방송사가 나섰다. 항공사도 특별히 그를 위해 좌석을 개조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그의 만남을 보고싶어했다.
39번 출입구의 문이 열린다. 공항과 항공사에서 특별히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열린 출입구 저편은 아직 조용하다. 목을 빼고 그가 나타나기 기다린다. 혹시 비행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일분이 일년 같다.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때. 멀리서 한 노인이 다리를 절며 나온다. 지팡이에 겨우 의지해있다. 그는 팔을 받혀주던 사람을 뿌리친다. 그는 되도록 꼿꼿하게 몸을 일으키려 한다. 힘차게 걸어오고 싶어한다. 눈물이 난다. 눈물에 그의 모습이 일렁인다. 손녀가 휠체어를 민다. 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는 내가 얼마 전에 특별히 만들어 준 양복을 입고 있다. 그의 걸음이 빨라진다. 짚고 있던 지팡이를 떨구고 나에게 온다. 그가 내 앞에 선다. 손을 떨면서 품에서 사진을 꺼낸다. 나도 사진을 꺼낸다. 내 손도 떨린다. 서로 사진을 확인한다. 흑백 사진 속에 아내와 내가 아이를 안고 있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나의 손을 잡는다.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없다. 그의 손 위로 내 눈물이 떨어진다. 그가 나를 끌어 안는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나의 마지막 전우는 너무 먼 길을 돌아 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