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와 가슴을 울리는 대화
머리와 가슴을 울리는 대화
일반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알려주거나 타인이 내가 생각한 행동을 하기를 바랄 때 일반적으로 두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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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교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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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이해시킨다.
위 두가지 방법 중 첫 번째 방법인 '타인을 교육 시킨다.'는 방법은 오감에 기반을 둡니다. 이 대화법은 어떤 기술이나 국,영,수 같은 학과 공부를 가르치는데 효과적 입니다. 혹은 신입 사원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 방법은 머리를 이해시키는 방법 입니다. 이는 말하는 사람이나 받아 들이는 사람 모두 직관적 이성에 의지합니다. 그래서 주제가 명확히 보이는 대화에 활용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제가 명확하다는 것은 시각이나 청각 같이 오감을 통해 서로 인지 할 수 있으며 결과를 판단 하는 기준도 비교적 객관적입니다. 위에도 설명 했듯이 업무를 가르치거나 기기를 조작하는 법과 같은 문제는 매뉴얼로도 대체가 가능하니 이는 가르침으로도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과는 빨갛다.'라는 것을 이야기 할 때 빨간 색 사과를 보여주면 쉽게 소통이 가능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관념적 주제를 놓고 대화할 때 사용하는 방법 입니다. 가르치는 주제가 명확하지 않고 상상에 의지해야 할 때.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주제의 의미가 달라질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애국심]을 들 수 있습니다. 2016년 대통령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관을 바르게 심어주어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을 기르는 것은 그 시작”이라며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조국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은 오감을 통한 인지적 가르침 만으로는 고취되지 않습니다. '국가' 라는 존재가 실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극히 관념적인 존재입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고 사고에 의존해야 이해가 가능한 개념입니다. 국가를 정의 할 수는 있지만 국가 자체를 보거나 듣거나 만져지지 않으니 국가에 대해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이런 관념적인 개체에 대해 '존경' 하거나 '사랑' 하라는 것을 일반적인 학과 공부를 가르치듯이 한다고 발현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이는 머리로 교육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시켜야 합니다. 애국심뿐만 아니라 애사심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성원의 가슴을 울릴 때 진정한 애사심이 나타납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 가족에 대한 사랑도 같은 이치입니다. 지극히 관념적인 주제에 주제를 대하는 사랑. 공경. 예의 같은 것도 지극히 관념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진정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설명, 해설, 충고, 조언이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단지 머리로만 이해 시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 이전에 가슴을 먼저 울려야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솔선수범'이 있습니다. 좋은 말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관념적인 문제는 개인의 가치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보다는 ‘얼마나?’ ‘어떻게?’ 가 더 중요한 문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솔선수범은 머리를 이해 시키기 보다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면 누가 솔선수범을 외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가슴을 이해 시켜야 하는 방법은 가정에서도 매우 요긴하게 쓰입니다. 아이와 대화 할 때 관념적인 주제를 머리로 설명 하려고 하면 아이는 ‘잔소리’로 받아 들입니다. 특히 부모와 자식이라는 뗄 수 없는 계급관계가 형성되어 있기에 부모가 하는 말의 진정성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부모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올바르게 받아 들이게 하고 싶다면 아이의 가슴을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선배가 후배를 대 할 때도. 상사가 부하 직원을 대 할 때도 관념적인 주제로 대화 할 때는 가슴을 울려주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하나 더 말씀 드리면 관념적인 주제는 실천도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체득한다. 라고 합니다. 실제 몸으로 느낀 정보가 쌓여 한 사람의 주관이나 신념으로 나타나는 것 입니다. 대표적인 게 도덕성입니다. 도덕성은 두뇌를 활용한 교육만으로 성숙 되지 않습니다. 도덕성이 두뇌를 깨우치는 교육으로 가능하다면 높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 일수록 높은 도덕성을 지녀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창시절 ‘도덕’ ‘윤리’과목에 100점 받았을것 같은 고위 공직자의 비리를 보면 쉽게 이해가됩니다. 이런 교육은 목표가 분명한 기능적 교육일 뿐이죠. 대학 진학을 위한 과목에 대한 기술을 습득하는 교육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단지 머리만 이해 시킨다고 도덕성이 성숙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슴을 울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죠. 가슴을 울려도 도덕성은 크게 향상되지 않습니다. 도덕은 법과 질서의 개념이니 '체득'이 병행 되어야만 도덕적인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국가의 법 정의가 얼마나 잘 지켜지느냐.’는 그 국가에 살고 있는 전체 시민의 도덕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 정도는 뭐 어때서’ ‘남들도 다 하는데 뭘 그래.’ ‘국회의원도 안 지키잖아’ 우리가 숱하게 체득한 결과 입니다. 그래서 신호를 잘 지키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고, 부정을 사실대로 말하면 왠지 비난 받을 것 같습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