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2017. 10. 3. 14:52

소크라테스


초기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관해 광범위하며 우주적인 의문들을 제기하는 일 에 일생을 바쳤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헤시오도스에 의해 제시된 통용 가능한 언어에 의 해 설명 가능한 세계에 대한 논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되었고, 그것은 인간과 삶 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입안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는 그 흐름의 연속 선상에 있으면서 철학의 물결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 이었다.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철학적 논의가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한 것에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 철학자들의 자연에 관한 해석들은 너무나 다양하여 일 관성 있게 제기되지 못했으며, 그 해석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방식은 결코 존재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이 다수적인 실체들로 구성되며, 만물은 지 속적인 변화 혹은 유전(流轉 : Panta rei)의 과정 속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파르메니데스는 실재란 유일하며 정체적인 실체, 즉 유일자(有一者)이며, 운동이나 변화는 사물의 현상이 우 리의 감관에 제공된 거짓된 환상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연과 사물의 비밀을 간파하는 데 따르는 난점들을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 논의에 대한 초조와 무관심은 결국 지적인 권태를 낳았으며, 철학은 오히려 이쯤에서 멈추는 편이 더 낫다는 풍조가 팽배하기에 이르렀다. 그 러므로 이성의 능력에 대한, 또는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가 초래되 어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실용성이 강조되는 결과들이 창궐하는 시대로 떨어질 무렵, 그 회 의주의가 던진 씨앗으로 인해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제 자연과 사물과 우주에 관한 이론을 제기하는 대신에 인간의 지식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과연 인간의 정신이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이러한 의문은 다양한 종족들과 시민들간의 문화적 차이들에 관한 논의에 의해 더욱 가열될 수 있었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질문은 점차 선(善)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게 되었으며, 만약 인간이 어떤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선(善)에 대한 보편적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그 질문의 종단을 향해 달려가는 무대 가운데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소피스트에 의해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 대해 가장 준엄하게 비판하는 편에 서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아테 네인들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동일한 부류로 취급했던 이유는 어떠한 문제든지 그 논 제를 냉정하게 분석한다는 면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하나의 적극적인 차이 점이 있었는데, 소피스트들이 극도로 면밀하게 어떠한 주제이든지 그 주제에 대해 또 다른 측면에서도 훌륭한 논지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었다. 또한 그들은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허무주의에 물들 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도덕적 이념들과 가치, 이성에 의한 판단과 그 의미까지도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 리를 추구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확고부동한 지식을 위한 기초의 정립이 그의 임 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선한 삶을 위한 기초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 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상호 관련시켜 선(善)을 아는 것이 곧 선(善)을 행하는 것이라고 계몽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식은 덕(德)"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변호사나 법률가들의 실용적 기능을 발전시키거나 진리를 오염 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진리와 선(善)의 창조적인 개념을 수립하기 위해 요청되는 논법, 즉 변증술(dialectic : 근대의 변증법과 구별하기 위해 변증술이라 함)을 입안하여 적극적으 로 전개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거류하던 시대에는 소위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그 어느 시대보다 많았다. 아이스퀼로스(Aeschylos)를 비롯하여 위대한 희곡을 발표하였던 유리피데스 (Euripides)와 소포클레스(Sophocles), 그리고 민주주의 시대의 정점에서 예술과 문화의 정 화를 이룩하였던 페리클레스가 함께 거류하였으며, 피디아스(Phidias)의 조각품과 파르테논 신전이 완성되는 것을 보았고, 아테네가 에게 해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거의 모든 무역에 독 점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전대 미문의 세력과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지상 최 대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 리고 크세노폰에 의해 전해진 것이며, 그 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의 진정한 천재였을 뿐 아니라 비상한 이성의 엄격성과 인간적인 따뜻함과 유머 감 각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강인한 힘을 가진 건장한 정신의 소유자로, 아리스토파네스 (Aristophanes)의 희극 「군중」에서 소크라테스의 눈을 굴리는 습관을 놀리고, 장난스럽게 그의 제자들과 '생각하는 상점'에 관해 언급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점잔을 빼며 걷는 물새에 비유하며 코믹하게 묘사하였다. 플라톤은 그러한 면모의 소크라테스를 수긍하면서, 그 위에 책임감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결벽한 그의 성격을 첨부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인식론과 정의

소크라테스는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숙련된 대화를 통해 도 달하는 방법, 지적(知的)인 산파인 변증술(dialectic)을 통해 획득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것은 항상 어떤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논의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대화의 과정을 통하여 상대 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들을 분명하게 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마침내는 의도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게 할 수 있었다. 이 기술은 간단해 보이지만 소크라테스와 함께 논의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반어법에 대한 불쾌함과 아울러 엄정한 엄격성 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대부분 어떤 주제에 대해 무지(無知)를 가장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주제에 관한 가장 충실한 지식을 유도해 내고 있다. 그는 이 변증술의 방법을 일종의 지 식의 산파술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에 따르면 이 산파술은, 어떤 사람이 불완전하고 그릇 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를 점차적으로 교정해 줌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 진리를 끌 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영혼의 영원한 구조에, 다시 말해 숨어 있는 모순 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정신은 어떤 대 상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이 주장 역시 증명해야 하는 것으로 믿었 다. 왜냐하면, 그는 되는대로 사는 삶이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심사숙고하지 않는 생각 역 시 소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화의 경우에는 결론 없이 끝 나곤 했는데, 이는 듣는 이에게 독단적인 관념에 붙잡혀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를 질서 정연 한 사유 과정을 통해 스스로 확실한 지식으로 인도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기술을 통해 참된 지식이란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배려(配慮)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정신의 힘은 사실들 속에서 그 사실들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영원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참된 지식은 바로 이 정신의 힘과 관계를 갖 는다. 장미가 시든 후에도 미(美)의 이데아는 남아 있다. 불완전한 삼각형은 삼각형의 이데 아를 정신에게 암시해 주며 불완전한 원은 완전한 원의 근사 도형으로 간주된다. 사실들은 다양한 생각들을 유발한다. 두 송이의 꽃은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두 사 람 혹은 서로 다른 문화도 같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해석되지 않는 사실 들에 제한시킨다면, 만물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보편적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소피스트의 주장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들로부터 수집했던 사실들 에 근거하여 모든 정의와 선(善)의 개념들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 테스는 이러한 주장에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 사이의 사실적인 차이 들, 키나 힘이나 정신 능력상의 모든 차이들은, 그들 모두가 인간이라는 또 하나의 확실한 사실을 흐리게 할 수 없다. 그의 정의의 과정을 통해, 그는 명백한 사실적 차이들을 무시하 고, 모든 인간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인간의 이데아의 개념은 그에게 인간에 대해 사유하기 위한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문화들은 서로 다르고, 문화마다의 법률과 도 덕률도 다르지만 법률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들 역시 인간의 이데아만큼 엄 밀하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자 생각이었다. 지적 회의주의나 도덕적 상대주 의 대신에, 소크라테스는 만일 우리가 분석과 정의의 기술을 사용한다면 다양한 사물들은 확고부동한 개념들을 산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실의 세계 배후에는 사물들의 질서가 존재하며, 그 질서는 정신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 만물을 조망하는 한 방식을 그의 철학에 부과시키는 것이기도 하였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방식은 분 명 목적론적 개념이었는데 그 사고방식에 의하면 만물은 하나의 기능 혹은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어떤 것이 정의될 수 있는 본성을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본성에 적합한 하나의 활동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만일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행동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점차 인간 은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