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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은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패밀리)
2019. 7. 15. 23:07
자유무역은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영국의 정치인 리처드 코브던(Richard Cobden, 1804~1865)은 “인류를 결집하고, 인종, 신념, 언어 에서 비롯한 적대함을 해소하는 자유무역은 영원한 인류 평화로 나아가는 전제조건이다”라고 열변 했다. 무역이 대포 소리를 잠재우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역사의 풍랑에서 힘을 잃었다. 시장 개방의 과정에는 무력시위를 통해 군사적인 압력을 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중국 (청나라)의 시장 개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포와 군함을 앞세워 경쟁국이 시장을 개방하 도록하고, 관세의 힘을 빌려 자국의 시장을 보호하던 시절도 있었다. 1842년, 대영제국은 3년간의 전쟁끝에 홍콩과 청나라의 주요 다섯 항구인 광저우, 상하이, 아모이(오늘날의 샤먼), 닝보, 푸저우를 같은 방식으로 점령했다. 이렇게 서구 열강은 침략을 통해 청나라를 강제로 개항시켰다. 영국의 목표는 차(茶)를 주력 상품으로 수출하는 청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수출함으로써(청나라는 1세기 전부터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침) 무역적자를 해소하고, 자국 상품 수출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발발 한 전쟁을 ‘제1차 아편전쟁’이라 부른다.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전쟁은 독일, 프랑스, 미국이 가세한 군사 개입으로 일어났다. 난징 조약 (1842년, 제1차 아편 전쟁 직후), 톈진 조약(1858년, 제2차 아편 전쟁 직후), 베이징 조약(‘이화원 약탈’ 이라고 명명한 방화 사건 후)을 체결함으로써 청나라 경제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청나라는 열강의 이권 침탈로 인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물론 청나라는 외세의 강요로 체결한 조약들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거세게 비난했다.
16세기부터 1830년대 초반까지, 중국은 세계 1위의 제조업 국가였다. 1776년,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중국은 유럽의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다”라고 썼다. 스위스 경제학자 폴 베어 록(Paul Bairoch)에 의하면, 당시 중국은 전세계 제 조업 생산의 약 1/3을 차지했다(유럽의 생산 점유 율은 1/4 미만). 과학 역사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철강, 기계식 시계 제작, 공학(특히 현 수교 건설), 심부 굴착 장비 등의 분야에 있어서 중 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국이었음을 입증한 바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혁신 중 일부(특히 화력 무기)는 쇠퇴를 거듭해, 무기와 군대 체계는 형편없이 약화했다. 결국, 청나라는 유럽의 신식 무기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불평등 조약’은 영국이 수년 전에 획득한 항구 5곳 외에 6개의 항구를 추가로 전면 개방하도록 했다. 서구는 각각 주요 개항 도시에 외국인 통치 특별구역인 조계(租界)를 설정했고(상하이 프 랑스 조계가 유명함), 조계 내의 행정권은 외국에 속했으며 조약에 의해 치외법권이 인정됐다.
관세 주권을 상실한 청은 관세를 품목에 따라 높게는 5%에서 최저 2~3% 수준으로 낮추어야 했다. 반면 자유무역을 내세운 서구 국가들은 정작 그런 원칙을 비껴갔다. 내수시장을 보호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1875년, 프랑스는 12~15%, 포르투갈은 20~25%, 미국은 40~50%, 일본은 25~30%의 관세를 적용하고 있었다(1913년 집계). 일시적으로 기술 영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지닌 영국만이 자국의 관세를 0%까지 낮췄지만, 자국의 패권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면서 다시 보호무역으로 회귀한다. 서구 열강들의 이권 침탈로 청나라의 경제는 활력을 상실한다. 1800년, 청은 전 세계 제조업 생산의 33%를 차지했지만, 그로부터 100년 후에는 6.6%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같은 시기 영국의 점유율은 4.3%에서 18.5%로, 미국은 0.8%에서 23.6%로 껑충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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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여 건에 달하는 자유무역협정은 오늘날의 국가 및 지역 간의 통상관계를 규정한다.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자유무역협정은 원론적으로는 각종 교역 목표와 국제 무역 기준을 관련국끼리 상호 협의해 결정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각종 자유무역협정은 일관된 의지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진국이 정하는 조건에 따라 전 세계 무역 시장을 예외 없이 개방하는 것이다.
1846년, 영국의 정치인 리처드 코브던(Richard Cobden)은 “도덕적 세계질서 속에서의 자유무역은 우주의 중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고 말했다. 그는 수입 곡물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곡물법에 반대해 반곡물법동맹(Anti-Corn Law League)을 창설한 인물이다. 코브덴은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은 마치 행성들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과도 같아서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적개심으로부터 인류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영원한 평화를 가져온다”고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파라과이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무역과 평화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당시에 파라과이는 자국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실시해 급속한 발전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때 자유무역을 명분으로 내세운 영국은 그 주변의 동맹국들(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이 파라과이를 침공하도록 종용했다. ‘삼국동맹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으로 불리는 이전쟁 으로 파라과이는 남성 인구의 90%가 목숨을 잃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1840년대 초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과 같은 상황이 중남미에서 되풀이 된것이다. 이런 병폐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교역’이 인류의 평화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선동하는 이들은 자취를 감추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913~1921)이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실현하고자 발표한 ‘14개 조 평화 원칙(Fourteen Points)’에서도 자유무역이 한부분을 차지한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행정부의 국무장관을 역임(1933-1945)하고 194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코델 헐(Cordell Hull)은 1948년에 “국가들 사이의 교역량 증가는 전쟁을 근절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 했다.
[르몽드지 스크랩:2019-07]
‘세계화’라는 단어는 연대, 교역, 여행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세계화’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전세계 시장의 규제 완화를 의미한다. 국가간 이동은 기업들의 쉬운 해외이전을 도모한다. 교류는 투자가들이 투기할 수 있도록하는 선에서 활성화된다. 그리고 연대는 ‘화합’을 내세운 국민간의 경쟁에 자리를 양보한다. 세계화의 이런 이중성은 과연 우연의 결과일까? 시장의 지속적인 팽창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세계화의 이중적 속성을 빌미로 반대 진영의 사람들에게 편협하고 아둔하기 그지없는 민족주의자라는 비난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