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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기록한 조선의 망국

(패밀리) 2019. 7. 15. 23:08

중국인이 기록한 조선의 망국

 

1. 한국의 관료들 >>

한국인이 자립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그 천성이다. 일본군이 한국의 수도에 들어오자 한국인들 중 유신당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모두 싱글벙글 희색을 띠었다. 앞 다투어 일본군과 내통하며 군대로 왕성을 막고서 왕비를 폐할 것이며, 대원군을 일으켜 다시 섭정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일본인들은 그 두 번째 것을 따랐다. 다만 왕비를 폐하는 일은 가지고만 있고 행하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구관들을 다 쫓아내고, 의정부와 8대 아문을 세우고는 명칭은 다 일본 것을 따랐다. 일본당 인물들로 채우고, 대원군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  대신들은 날마다 회의를 열었으나, 그저 입에 담뱃대나 물고 한가로이 근거없는 이야기만 하며 국사에는 하나도 미치지 않았다. 안에서는 붕당이 서로 배척하여, 서로 배에 칼을 꽂으려 했다.

 

 

2. 헤이그 밀사 사건과 고종 >>

광무12년 7월, 한국인 이상설, 이위종, 이준 3인은 자칭 한국 황제의 대표라며 돌연 네덜란드 헤이그에 출연하여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며칠 지나서 미국인의 이름을 사용하여 각국 큰 신문사에 전보를 보낸이가 있었다. 한국 황제가 지금 일본 경찰에 갇혀 마치 묶인 죄수 같으며, 밤낮으로 거기서 눈물로 얼굴을 씻고 있다고 했다. 일본인들이 격노했고, 한국인들은 실색했다.


그달 4일, 한국 황제는 통감(이토 히로부미) 관저에 특사를 파견하여 밀사가 자신과 관계없다고 변론했다. 한국 조정의 대신들도 연일 오직 통감을 찾아가 각자 밀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아 사정을 알지 못한다고 변론하고, 아울러 통감이 이 일을 처리할 수습책에 대해 정탐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시종 침묵을 지키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6일, 각 대신은 어전회의를 열어 한국 황제에게 사실 유무를 물었으나, 한국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열흘을 끈 뒤 한국 내각은 결의하기를, 한국 황제가 양위하여 일본에 사죄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 황제는 대로하여 듣지 않았다... ...


한국 황제는 통감 이토를 소견하여, 간절하게 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맹세했는데, 언사가 매우 애처로웠다. 이토는 대답하지 않고, 양위 가부를 물었다.... ...

 

3. 친일파- 일진회 >>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일본이요. 일본을 도와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한국의 일진회다. 일진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정당의 이름을 사칭하고 적에게 아부함으로써 부귀를 얻은 자들이다. 일진회의 영수는 송병준이요, 이용구인데, 병준이 특히 주동이었다. 그 사람됨은 본래 음흉하고 악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으며, 기회를 틈타는데 교묘했다.... ...

 

병합의 행위는 결코 그 아름다운 명예와 서로 용납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그것을(한일병합) 입 밖에 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다행히 일진회가 나와 도와주고 앞잡이가 되어주었다.


이토가 암살당하고 9일 뒤, 용구는 회원 30만을 거느리고 연서하여 한일합방청원서를 그 정부 및 통감부에 바쳤다. 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접수를 거부했으나, 합병론은 이미 전 한국에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병준은 일본을 이리저리 다니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나 용구와 그 회원은 매일 각 고을로 유세를 다니며 합병의 이로움을 찬양했다. 그 말이 "합병이 되면 우리 한국 백성은 이제부터 드디어 일등 국민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서로 호소하자 한국 백성중 이를 믿는 자들이 더욱더 많아졌다.... ...


일본이 합병의 공을 찬양한다면, 송병준. 이용구가 마땅히 이토 히로부미 위에 있어야 할 것이다.

 

4. 한일병합조약 >>

이 조약(한일병합조약)과 동시에 공포된 것으로 또한 일황 조서 4통이 있었다. 그 1통은 합병의 의의를 공시한 것이며, 제2통은 이왕가(이씨왕가)의 우대에 관한 조서로, 전 한국 황제는 창덕궁 이왕으로, 전 태황제(고종)는 덕수궁 이태왕으로 책봉하며, 특별히 은혜롭게 전하의 경칭 사용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제3통은 전 한국 황족 이강, 이희 2인을 공(公)으로 봉인한다는 것이며, 제4통은 한국 경내의 조차를 대사면 하는 것으로, 재차 합병을 선언하고... ...


조선의 주권자는 10년 전에 본래 임금이었다.(대한제국 이전) 이제 망해서도 임금 자리는 얻게 되니 가히 한은 없으리라.(고종과 그 왕족)다만 그 재산을 향유할 수 있는지 여부는 조약 가운데 명문화되어 있지 않았다... ...


18일 일본 정부는 임시 내각회의를 열었고, 22일에는 임시 추밀원회의를 열어 25일 한일합병을 공포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갑자기 그달 28일 한국 황제 즉위 만 4주년 기념회를 열어 축하한 뒤 발표하기를 청하자, 일본인들이 허락했다. 이날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외국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에 무릇 혈기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


한국이 멸망함에 군현의 장관이나 해외 유학생들 가운데는 순국자가 꽤 있었다. 그러나 한국 조정의 고관들은 한 사람도 순국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지방의 농민이나 교포 상공인들 중에는 또한 재산을 기부하고 몸을 바쳐 광복을 도모한 자들이 있었다. 지금 신문에서 막 그소식을 전해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한다... ...


군자는 그 뜻을 아파하고 그 때를 잘못 만남을 슬퍼할 따름이다. 

 

[랑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중에서]

랑치차오는 근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한국에서 조선의 망국을 보고 들은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중국도 조선과 같은 망국의 길을 가지 않으려면 조선 망국사를 상세히 들여다 보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