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서시-윤동주
[시평] 서시-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맹세합니다. 하늘을 우러른다는 말은 자신에게 떳떳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의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자는 고개를 들지 못하죠. 이는 자신을 향한 세상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도 사람의 눈을 바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 양심의 부재로 죄의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떳떳하다고 오판하기 때문입니다. 집단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죄지은 사람은 고개를 떨구는 마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말은 그 자체로도 세상에 대한 도덕, 윤리적 기준을 제시한 것과 같습니다. 신념의 상징과도 같은 거죠. 이런 도덕, 윤리적 신념의 기준은 드넓은 하늘에 한 점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넓디넓은 하늘을 우러러봤을 때 티끌 한 점 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굳은 신념은 그의 고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만주국 간도성에서 출생하여 대표적 민족학교인 '명동소학교'에서 배움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숭실중학교'에서 민족적 교육을 받았으며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숭실중학교를 떠나 편입학한 '용정광명학원'에서 문익환, 장준하, 정일권 등 민족주의 학우를 만나 동문수학했습니다. 시인은 이런 교육에 따라 민족주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익혔습니다.
이런 시인이 전쟁 물자 동원령에 반발하고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선진 문물에 대한 배움의 길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일본 유학이었습니다. 수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 시인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1942년 1월 19일 창씨계를 제출하고 1월 24일 <참회록>을 통해서 그의 굴욕적인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서시가 쓰인 시기는 1941년 11월 20일 경이니 윤동주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이 시를 썼습니다. 전쟁 동원령에 따라 일본 군대로 징집이 되느냐, 아니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하러 가느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조국과 민족에 떳떳하지 못한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고뇌를 시로 표현했으며 이후 참회록을 통해서 스스로 참회합니다.
시인의 한 점 부끄럼은 바로 이런 고뇌가 깊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시인은 자신의 죄를 죽을 때까지 참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강한 의지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 하더라도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주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멀리서는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뭇잎은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흔들립니다. 결국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으니 그는 죽는 날까지 한시도 거르지 않고 스스로 참회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강도의 도덕률을 스스로에게 적용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칸트의 [자기 입법]의 원리를 넘어서는 신학적 도덕률입니다. 즉. 이 문구에는 기독교적 도덕률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람은 끊임없는 괴로움이기도 합니다. 아무 힘없는 가녀린 잎새가 조선이라면 바람은 끊임없이 조선을 괴롭히는 외세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국의 운명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에게 떳떳한 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서시를 딱 이 대목까지만 읽고 더는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과연 자신이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가? 그리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시인의 굳은 의지에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나 스스로에게 되묻고자 합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생각해 봤는가?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어쩔 수 없는 실수였어'
라고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기억이 많습니다.
그러한 지난날을 부끄러워하고 앞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30년이라는 강점기를 지나면 누구나 그렇게 살았고 누구나 그럴게 살 것 같은 미래가 없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어제도 식민지 시절이었고 오늘도 눈 떠보니 식민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내일도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가겠죠. 변함없는 현실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의 창씨개명이 사회에 미칠 파장이 얼마나 대단할까요? 당대의 지식인, 정치인 모든 사람이 변절하는 세상에 시인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강한 도덕적 기준을 통해 민족과 자신에게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서시는 첫 대목 하나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감동을 전달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은 윤동주 시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우선 별은 이정표입니다.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인 셈이죠. 별을 통해서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윤동주 시인의 길을(미래를) 의미합니다. 또한, 별은 어머니입니다. 타지에 뜨는 별과 고향에 뜨는 별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별을 통해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시인에게 별은 고향 어머니와 친구들이 추억을 같이 공유한 개체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타향에서 그리워한 고향의 별. 앞으로 일본에서 조국을 그리워할 별. 시인의 모든 그리움은 별 속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별은 어머니입니다. 시인은 [별 헤는 밤]에서 별과 어머니를 동일시합니다.
결국 별은 시인에게는 자신의 길임과 동시에 고향, 친구, 어머니인 셈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투영하는 별입니다. 이를 노래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이상을 노래함과도 같습니다. 시인이 가진 모든 것을 노래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별을 노래하는 노래가 만가일까요? 아니면 희망에 찬 노래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 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미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모든 것도 아닙니다. 하필이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생명체는 괴롭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의 고통. 두려움, 그리고 회한까지. 죽음 앞에선 생명체는 그 자체로 모든 슬픔을 다 간직한 존재입니다. 시인은 이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맹자가 이야기한 측은지심입니다. 루소가 말한 연민의 정이죠.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유는 자신에게 내린 벌 때문입니다. 시인은 앞에서 스스로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죽을 때까지 잎이 흔들릴 때마다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스러운 괴로움으로 자신에게 형벌을 가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길이 구원의 길임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고통 뒤에 따르는 구원의 희망은 그 고통만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근대화 시기에 쓰인 문학 속에서 우리는 극한의 고통을 통해 구원의 희망을 더 강조되고 구원의 아름다움이 더 부각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나 괴테의 파우스트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종교적 운명론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굳은 의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이제는 어떤 어려움이라고 묵묵히 걸아 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한 거죠.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겠다는 의지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시인이 잠자리에 들 밤에도 여느 때와 같이 시인의 존재와 같은 별은 고통스러운 바람에 스치고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