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위대한 항거
흔히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 투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복종을 거부하는 노조 활동과 자유로운 노동 활동은 이미 확립되어 있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반항인 것이다.아나키즘이 순수한 사회운동이면서도 동시에 상상력이 풍부한 거대한 추진력이라는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애초에는 영국의 사상가인 윌리엄 고든이 당시의 정치 정의에 관한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구체화시킨 비판적 분석이다. 바이런 경과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빌리 셀리 같은 친구를 둔 그는 그들과 함께 정치·사회적, 개인적 벽을 넘나드는 사회 전복적인 성격의 모험을 공유했다. 이 같은 경험은 영국 사회 사상을 상당한 폭으로 변화시켰으며 아나키즘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 이후 19세기 내내 사를르 푸리에, 피에르-조셉 프루동,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등과 같은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직화된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 태동의 1872년 9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미국 분과 등을 불러 모아 스위스 셍티미에르에서 개최한 '국제 반 권위주의 대회'다. 이 대회에선 무엇보다 "모든 정치 권력의 파괴가 프롤레타리아의 첫 번째 임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프랑스에서는 상호공제조합 부조론의 실행과 그 이론적 창시자인 프루동이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1848년에 이미 200개가 넘는 상호공제금고가 생겨났으며, 오늘날까지 상호공제조합으로 사회 보장 시스템에 그 제도적 족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또한 노동거래소와 노동총연맹(CGT)의 창설로 노동조합의 역사에서도 중대한 위상을 남겼다. 페르낭 펠루티에에 의해서 활성화되어 파업원호금고를 설립하여 병들고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것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고 일반 내지 직업 강좌를 통해 노동자들의 직업 교육도 지원했다. 노동총연맹에서의 아나키스트 역할은 "노조는 그 자체로서 타당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며, 행동 강령을 채택한 1906년 아미엥 헌장으로 대변된다. 또한 정치 단체에 대한 독립성의 문제는 20세기 내내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차별성을 드러내주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선동·투쟁모토 '급진화' 역할그러나 이 운동은 또한 1831년 리용 견직공장 공원들의 폭동과 같은 사회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래 동안 이 폭동을 부추긴 카리스마적인 배후 인물을 찾았으나, 결국 폭동은 이 운동의 두 개의 축인 직조공들과 그 작업장의 선임장간의 상호 부조적 구조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알려진 바대로 으젠느 바를렝, 루이즈 미셀, 엘리제 르클뤼 같은 프루동식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한 1871년의 파리 코뮌도 마찬가지다.
아나키스트들이 투쟁이나 선동 모토를 급진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다양한 형태의 거친 파업이나 노동자 계층의 통제할 수 없는 폭동이 그러하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무런 여과 없이 그 운동을 주도하거나 투쟁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20세기 후반, 특히 1970년대 이후 이러한 운동들은 켄 로치가 촬영한 리버풀의 부두 하역 노동자 파업에서 보듯, 노조 지도자들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2007년 10~11월 오아사카의 '환희에 찬 바리케이트'는 그런 '작품'이었다. 300~400개 그룹으로 결성되어 매일 급진적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오아사카 인민의회는 율리시즈 루이즈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자신들만이 정당한 권력을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곤 "그들은 우리를 통치하고자 한다. 이러한 도발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즉각적 삶의 형태 변경' 시도무정부주의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측면에선 이들이 선구자인 셈이다. 특히 개인주의적 행태는 절대 자유주의적인 공산주의보다 한 수 위다. 그들은 사회적 관계와 개인적 선택, 그리고 정치적 결정에 개인을 통합시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들에게 개인의 자유란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이러한 지적 토양 속에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주요 민간 운동이 잉태되었다.
아나키즘적 개인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실패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보다 격렬히 저항했다. 경제를 모든 분석의 중심에 놓지 않고도, 일상의 것들을 투쟁의 우선순위에 놓음으로써 공산주의의 대상과는 다른 것들을 문제로 부각시킨 것이다. "아나키즘은 정신을 관장하는 공무원이 아니다"고 알베르 카뮈가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도로의 동반자"라고 조롱하면서 차라리 아나키스트들을 "회의의 동반자" 라고 보았다. 이들은 개인과 자유를 존중하되, 특히 부과된 명령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때 복종이라는 단어와는 양립하기 힘들다. 이런 관점에서는 소위 양심에 의한 반대자의 위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반 세계화 운동에서부터 불법 이민자투쟁, 서방 선진국 정상회담 반대 집회, 환경과 반핵 투쟁 등을 통해 언제나 아나키즘의 그림자를 느낄수 있다. <르몽드 편집>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