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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3] 자유-자연계의 자유(3)

(패밀리) 2019. 8. 11. 08:14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자연에 예속되어 살고 있습니다. 자연을 벗어난 삶은 존재하지 않는 거죠. 인간 역시 자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지구조차 자연의 일부이니 인간도 자연계를 벗어난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에 예속된 인간의 삶이 자유로운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지난 게시물에서 밝혔듯이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롭다는 명제를 확인했습니다. 그 기준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자연계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은 매우 고통스럽겠죠. 자연계에 존재하는 개별적 존재가 자유로운 상태라면 이 모든 것이 합쳐진 전체 자연계가 자유로운가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 개체의 자유는 자연의 질서 그 자체의 자유와 같다.라는 개념이 성립됩니다. 짜인 틀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자연계를 벗어나지 않기에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라고 하지만 사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사례는 없습니다. 자연을 더 많이 이해하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것은 자연법칙인 중력을 거슬러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라 한다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도 자연을 정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오르는 것도 자연을 정복했다고 한다면 그곳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은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 했다고 한다면 과학적으로 자연계의 법칙을 뛰어넘는 성과물을 보여주거나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해야 하는데 현재는 자연계에 나타난 질서를 설명하는 단계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랜 옛날부터 '신'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번개 치는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에 '제우스'라는 신을 통해서 자연 현상을 이해했던 것이죠. 이런 자연의 법칙이 자유롭다면 그 속에 포함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도 자유로운 것인가를 고민해 보겠습니다.

 

만일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픈 것은 위장이 비어 있어서 그 자체로 배가 고픈 것일까요? 아니면 위장이 비어있는 것과 상관없이 뇌의 인지 기능이 작동하여 '배가 고프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요? 추가로 말하면, 걸식증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걸식증은 배가 고프지 않은 상황임에도 배가 고픈 것으로 오인해서 과도하게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병이죠. 이 병에 걸린 사람의 배고픔은 위장이 배가 고픈 것일까요? 뇌가 배가 고프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따져보면 인간 행위는 그 자체로 자유롭지 못한 게 됩니다. 즉 배가 고프지 않은 상황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할 텐데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죠. 배가 더부룩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장에 음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배에 가스가 차 배가 고프지 않다고 느껴 음식을 먹지 않은 경우에도 실제로는 배가 고픈 상황임에도 배가 고프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죠.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일차적 사유 활동은 다름 아닌 의지 활동, 즉 주어진 김각 표상에 대한 동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토아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동의에 따르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동의의 자유는 희랍의 철학적 의미인 '욕망'과 같은 감정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자유는 아닙니다. 동의는 그 자체로도 의지의 표현이지만, 스토아 체계에서 이러한 의지는 어떤 감상적이고 본능적인 경향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성적 의지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지하고 생각하는 의지적 활동이 인간 스스로 자유로운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어 앞서 본능에 따라 느껴지는 어떤 상태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동의하는 자세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육체적 상태에 대해서 부정하고 거스를려고 한다면 그러한 본능적인 상태와 의지가 충돌 해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배가 고프다는 것이 자체로는 자유롭지 못해도 배가 고픔을 인정하고 이를 해소하는 방법에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합니다. 만일 배가 고픔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고 의지적으로 이겨내려고 한다면 배고픔을 이기는 행위 자체가 그 배고픔에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한 게 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지각하고, 자신의 부분과 밖을 구별하며, 더 나아가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관심으로부터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 되며, 동시에 타자를 낯설고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좋아하고 추구하게 되는 것이죠. 이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근원적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행위하고, 모든 외적인 것을 자기 자신의 관점과 기준에서 고찰하고 자기화하고자 합니다. 바로 여기서 동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행위는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인 자기보존이라는 목표로 환원된다는 스토아의 이론이 도출되는 거죠. 결국 인간의 자유는 자연을 넘어선 무조건적, 무제약적 자유가 아니라, 원초적으로 생명의 보존을 지향하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 종속된 자유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연에서는 동의의 기준 자체를 스스로 창출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간 본성의 법칙들을 포함한 자연 법칙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연계에서 인간의 자유는 자연계 법칙 속에서 인간 스스로가 선택한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자연 속에서 인간은 자유로운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잘 풀어서 만든 작품 중 하나가 명작 소설 반열에 오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주인공은 현실 세계에서 부딪히는 복잡한 상황이나 생각으로 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정신적 자유로움을 추구합니다. 어찌 보면 갈망하는 상태인데, 주인공은 이를 동양철학인 불교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자 합니다. 이에 비해서 조르바는 육체적인 자유. 즉 본능적 자유를 통해서 정신적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조르바가 보여주는 육체적 자유는 인간 본성 중 하나인 성적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아닌 이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자연적인 상태 안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있던거죠. 주인공은 정신적인 자유를 갈망하고자 육체적 속박을 선택했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연상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육체적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얻었다는 것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주된 의미입니다.

 

자연계에서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철학자가 추구한 종교적 교리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마치 짜인 하나의 각본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하는 운명에 사로잡힌 존재입니다. 이른바 '운명론'이나 ;숙명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 법칙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라면 인간 역시 태어나고 죽는 과정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운명론의 핵심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쳐봤자 결코 운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죠. 만일 악한 행동을 했다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 운명이라면 악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죽어서 심판을 받기에 결국 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원인이 있다면 그에 따른 결과가 반드시 일정한 법칙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운명론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도 이런 운명론과 같은 원인과 결과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통 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언젠가는 사고가 난다.가 운명론적 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운이 좋아서 사고가 안 난다면? 죽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적인 운명론인 것이죠. 중세 시대는 기독교가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시기였으므로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철학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입니다. 윤회사상도 하나의 운명론적 사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단지 불교는 정신적인 자유를 통해서 육체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타 종교와는 다릅니다. 수많은 번뇌는 현실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육체와 정신 수련을 통해서 이런 번뇌를 이겨내는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입니다. 어떤 것에서도 속박되지 않은 온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죠. 불교는 인도에서 탄생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행은 인도의 여러 수행자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 스스로 육체적인 고통을 동반한 수행을 하는 것은 이런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행동을 통해서 모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죠. 내가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것은 다른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며, 결국 나는 스스로 만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면 모든 육체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열반에 드는 과정이 무척 고통스럽다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정신적 수행을 통해서 이겨낼 수 있는 것이죠.

 

자연계에서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적 자유를 공부하는 것에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자연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 개인이 갖는 능력이 모두 다르기에 이 자체로는 평등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계 상황은 모두 평등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연계에 예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러한 상황은 평등한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평등하며 이러한 평등사상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 주기 위한 장치가 됩니다. 만일 인간이 자연에서 평등하지 못하다면 인간의 자유는 사회적으로도 평등하지 못한 경우가 되니 각자 누려야 할 자유의 질과 양도 모두 다릅니다. 이는 왕정주의의 근간이며 계급사회의 밑거름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능력에 따라 자연에서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인간의 평등은 무너지게 되는 것과 같은데 이런 조건이 바로 계급사회를 뜻합니다.

 

자연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데 얻을 수 있는 추가적 의미로는 자연에 대해 자유로운 인간의 지배는 '자연의 위기'와 인간에 대한 '자연의 저항'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인간의 위기'로 귀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은 첨단 기술의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삶의 토대는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 발달에 따라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과연 자연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가?를 깊이 있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함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죠. 결국 이런 파괴행위에 따른 결과는 인간의 멸종을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자연계의 자유를 논하는 것은 인간 삶이 자연에서 벗어 날 수 없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