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2019. 11. 6. 23:31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과 관련한 이야기가 연일 회자되고 있다. 조국 후보자 딸의 노력이나 천재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딸이 누렸었던 스펙 쌓기에 대한 국민적 충격에 대한 이야기다. 대학을 진학 하거나 스펙을 쌓는데 있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 섰다는데 큰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라는 논쟁은 잠시 접어두자.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마치 상식선을 벗어난 형태로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과 분노를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기득권 세력의 전유물로 알려진 그들만의 카르텔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분노를 넘어 상실감까지 느끼게 한다. 

 

  이 사태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이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 찬스를 사용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경쟁으로 포장된 출발선이 알고보니 출발선만 같았을 뿐이었다. 모두가 맨발로 서 있는 출발선 위에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가 사준 스파이크 달린 운동화를 신고 서 있는 경쟁자의 모습에 많은 사람이 이른바 멘붕에 휩싸였다. 


  조국 교수의 해명처럼 미안하고 죄송한 일이지만, 단순한 사과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 있다. 그의 말대로 진보는 강남에 살아서는 안될 이유도 없고, 귀족적 자산을 누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진보에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 경향이 있음을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시대 진보가 보수와 다른 결을 지녔음을 인정 받은 프레임은 진보 스스로 만들었다. 사실 보수보다 더 깨끗한 삶을 요구하는 것을 국민의 명령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한 것도 진보 진영이 한 일이다. 스스로 청렴하고 정의로운 길을 열겠다는 진보 인사가 보수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형태의 일을 저지른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비슷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라파예트나 브리소와 같이 세습 귀족 출신이면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 인물들이 있는 반면 진보를 추구할 것 같은 사람이 왕정복고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진보는 반드시 이러 이러 해야만 한다는 갇힌 사고로만 이번 사태를 이야기 한다면 너무 좁은 시야에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와 같다.

 

  전 고려대학교 경제학부장을 지낸바 있는 장하성 교수는 민중의 분노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고 역설했다. 장하성 교수는 지난 반세기 한국의 발전속에 감춰진 이면을 들추면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팍팍한 삶에 분노할 줄 알야야 한다고 강조한바 있다. 그래야만 철옹성과 같은 그들만의 카르텔이 무너지고, 많은 시민이 살기 좋은 경제적 기반이 만들어 진다고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과 함께 본인이 추구하는 경제 정책에 대한 이야기는 전문적 분야라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과거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를 구겨신는 멋스러움이 일부 상류층에서만 할 수 있는 특권적 행동이었다면 현재는 뚜벅이와 외제차로 계급이 나누어질 만큼 청년층의 계급화는 심화되었다. 과거를 하나 더 소환 하면, 가난한 대학생이 방학동안 열심히 '노가다(건설 일용직)'를 뛰어서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집안에 보탬이 되었다면, 현재는 방학 뿐만 아니라 학기중에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해도 한 학기 등록금은 고사하고 생활비 벌기도 빠듯한 시대를 살고있는 청년에게 사회 지도층이 던져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1990년대 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비정규직이 IMF속에서 잉태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는 비 정규직만 강요하는 괴물로 자랐다. 고도 성장의 달콤함은 부모나 삼촌 세대가 이미 향유해버려 미래가 창창한 젊은 세대는 패자 부활전 조차 허용하지 않는 극도의 경쟁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그 누군가의 화려한 스펙 쌓기가 먼 꿈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태생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신분제도는 2019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는 이번 사태로 바꿀 수 없는 신분제도가 아직 이 땅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라질 듯. 사라질 듯 하면서도 전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삶속에 은밀하게 침투한 계급 사회는 우리가 모르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이 사회를 좀먹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한국노동연구원이 2017년 7월에 발표한 ‘직업계층 이동성과 기회불균등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자식이 부모 직업군까지 대물림한다는 이른바 ‘수저계급론’의 민낯이 드러난다.

 

아버지가 ‘1군 직업’(입법공무원, 고위공무원, 기업 임원 및 관리자, 전문가)에 종사할 경우 자녀도 1군 직업을 가질 확률이 32.3%로 나타났다. 반면 이들의 자녀가 판매종사자 등 ‘3군 직업’(서비스 종사자, 판매 종사자, 농업 및 어업 숙련종사자, 단순노무 종사자)을 가질 가능성은 13%로 낮았다.

 

아버지가 3군 직업일 경우 자녀도 3군 직업을 가질 확률은 24.1%였다. 이는 1군과 2군 직업(기술공 및 준전문가, 사무종사자, 기능원 및 관련기능 종사자, 장치·기계 조작 및 조립 종사자)을 가진 아버지에 비해 3∼11%포인트 가량 높은 수치다. 앞서 2016년 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 보고서를 내놨다. ‘개천용’ 신화가 이제 사라지고 있음을 흙수저 청년들이 깨닫고 있다는 씁쓸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190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보다 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부모의 학력과 직업, 사회적 계층을 대물림하는 경향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정보화 세대’라 불리는 1975~1995년생들에게서 아버지가 중상층 이상일 때 자식도 중상층 이상일 확률은 아버지가 하층일 때 자식이 중상층 이상이 될 확률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세계일보 기사 발췌)

 

이제. 우리는 이수역에서 컵라면 하나를 남기고 산화한 청년을, 제주도에서 도제 제도에 착취당하다 죽은 어린 학생을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장하성 교수의 말처럼 분노해야 한다. 그 분노가 조국 교수의 딸 개인을 향한 분노라 한다면 이와 비슷한 일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다시 벌어지게 된다. 하나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전체 사회의 맥락을 짚어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자신의 기득권을 움켜쥐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21세기형 계급 사회를 용인하라'며 요구하는 그들을 향해 이제는 분노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