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82년생 김지영
[영화평] 82년생 김지영
지난 8일 82년생 김지영을 관람했다. 영화 관람이 여러 취미 중 하나이기에 장르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은 없으나 이번 영화는 다른 영화와 달리 관람 목적이 분명했다. 최근 큰 이슈로 떠오른 페미니즘의 중심에 있는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기에 영화를 통해 페미니즘을 어떻게 표현했느냐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봤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나의 관람 리스트에 오르지 못했을 영화였을 것이다.
우선 영화를 보고 난 관람평을 미리 적자면 <<주말 드라마를 돈 내고 영화관에서 본 느낌>>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철저히 페미니즘을 중요한 주제로 한 소설이 원작이기에 이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노력이 보여야 했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그런 노력이 전무하다. 단지 감성(혹은 감정)에 기댄 호소만 무분별하게 나열했다. 물론 페미니즘을 섣불리 꺼낸다는 것에 감독이 가질 부담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말 드라마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다만 페미니즘 소설을 가족 드라마로 승화시킨 감독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1.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의 힘든 결혼 생활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서 '어려운'이 아닌 '힘든'이란 말은 결혼 생활에 따르는 문제가 온전히 주인공 김지영의 정신적 고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어려움보다 여러 상황에 따른 정신적인 힘듦이 김지영을 육아 우울증과 같은 정신의 황폐화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듦의 중심에는 흔히 '시월드'로 불리는 시어머니가 그 중심에 서 있다. 또, 친정엄마나 친척(고모)까지 김지영의 힘듦을 위해 맡은 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한다.
감독은 김지영이 처음으로 힘듦을 토로하는 명절 시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 이 영화가 앞으로 페미니즘 구도에서 벗어나 가족 드라마로 영화를 풀어나갈 것을 고백한다. 시댁에서 명절 상차림은 대한민국에서 사는 대부분의 며느리가 공감하는 주제다. 영화 내용 그대로 남자는 먹고 놀면서 여자는 뼈 빠지게 상차림을 준비한다. 그리고 제사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여자가 존재한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예법이 어느새 가족 사이에 불편한 관계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자의 희생을 강요할 수만은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에는 김지영을 힘들게 만드는 주체는 남자가 아닌 같은 여자이다. 하나의 반찬을 끝내기도 전에 엄청난 양의 만두소를 들고 나타나는 시어머니가 김지영을 힘들게 한다. 그걸 누가 다 먹느냐는 아들의 호소는 공허하게 사라지고 이 정도 음식 준비는 당연히 해왔던 일이라는 시어머니의 핀잔은 본인이 견뎌왔던 세월을 김지영에게 각인시킨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던 법도였기에 이를 깨트려야 할 주체는 시어머니다. 힘없는 82년생 김지영에게는 이 상황을 주도할 어떤 힘도 주어지지 못한다. 결국에는 시어머니가 오랜 세월 불합리한 규율에 속박 당한 체 같은 여자인 며느리의 힘듦에 가해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불합리한 규율은 어디까지 김지영의 관점에서 말한 불합리함이다. 그리고, 가족은 이 힘듦을 외면한다. 아니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늘 그래 왔던 익숙함은 당연함을 낳고 그 당연함은 사람을 무신경의 늪에 빠트린다.
감독은 남편을 시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적절히 끼워 넣어 '이 문제는 페미니즘이 아닌 가족 문제야'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 집안 규율을 결정하는 절대적 존재는 남자였다. 남자의 지엄한 명령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고 그 명령은 예법이 되어 이어졌다. 그런 남자의 지엄한 명령은 시아버지에서 남편으로 이어지면서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 시아버지의 권위주의는 남편에게 전달되지 않고 변했지만, 시어머니의 자세는 여전히 며느리에게 강요되고 딸에게 전달된다. 역설적이게도 주인공 김지영의 집인 친정어머니의 자세는 언니인 은영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은영은 부모 세대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전통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런 은영을 김지영은 걱정하면서도 부러워한다. 김지영의 복잡한 이중성이다. 결국, 은영과 김지영의 입장 차이는 선택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은영이 거부한 전통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여성적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 지영은 현실을 거부하지 못 한 체 살아간다. 그래서 영화는 대물림되는 부조리한 현상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이유를 사회적 논의로 끌어 올리는 것에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매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영화는 명절 이벤트에서 시작해서 김지영이 과거를 회상을 장면에 이르러서 여자의 힘듦을 철저히 조명한다. 고모나 할머니가 회상 속에 등장해 여자가 가져야 할 자세나 집안에서 남자의 위치에 대해서 잔소리로 늘어놓는다. 김지영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강요하는 것 역시 여자가 그 중심에 있다.
감독이 이 영화를 가족 드라마로 끌고 가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며느리와 딸. 그리고 아내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가 그동안 지영이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대사가 바로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다. 그리고 감독은 친정어머니의 손에 난 상처를 여러 번 보여 주는 것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강조한다. 친정어머니 손에 난 상처는 생물학적으로는 완치되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그래서 손의 상처는 마음의 상처를 대변한다. 엄마는 이 상처를 딸에게, 며느리에게 대물림한다. 과거 근본주의 사회 속에 잉태된 부조리가 할머니로부터 어머니에게 대물림되었고, 다시 어머니에게서 딸로 대물림되는 악순환을 감독은 손에 난 상처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로 빙의(?)된 김지영의 입을 통해 어머니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인제 그만 지영이를 놓아줘. 지영이는 충분히 잘 할 수 있어..."
2. 남편의 눈물과 남자를 소비하는 영화
영화는 남편을 통해서 아내 문제가 사회 제도의 문제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남편은 충분히 아내의 힘듦을 공감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에게 여가 생활을 하라는 권유나 자신이 육아 휴직을 하겠다는 태도. 그리고, 상담사를 먼저 찾는 자세에서 남편의 고민을 충분히 보여준다. 하지만 남편 외에 남자라는 대상을 소비하는 자세는 무척 불친절하다.
남편 회사에서 남자직원과 아내 회사에서 남자 상사의 모습은 일반적인 회사에서 남자의 모습이 아니다. 김지영의 학생 시절 회상에 등장하는 남학생 역시 남학생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를 남자와 여자라는 문제로 확대하는 자세는 곤란하다. 만일 이것을 페미니즘 문제로 끌고 간다면 김지영은 버스 정류장에 아빠를 부를 것이 아니라 엄마를 불렀어야 했다. 아빠라는 존재 역시 딸에게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할 수 있는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범죄 행위에 대해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페미니즘식 접근은 곤란하다. 범죄는 범죄일 뿐이고 페미니즘 이와는 별개다. 같은 논리로 생각하면 남편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시대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화 한다면 남편 역시 성범죄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 일 것이다. 일반화의 오류를 어떤 비판 없이 받아들이면 이 세상에서 남자는 박멸 대상이 되어야 한다. 특히 김지영이 카페에서 커피를 시킬 때 맘충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물론 이런 경험을 한 누군가는 있겠지만 그런 경험은 일반적인 경험이 아니기에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반대로 김치녀나 개똥녀로 잘린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 역시 일반적인 여자로 볼 수 없다.
영화는 남편을 제외한 모든 남자를 단지 성적 문제자로 소비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성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부재한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기에 남자를 소비하는 감독의 자세에 동의활 수 없다. 문제는 또 있다. 딸이 학창시절 성범죄의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아버지의 태도 역시 일반적인 아버지의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자신의 딸에 보여주는 자세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신의 딸이 성범죄를 당할 뻔한 사실을 알고도 딸을 핀잔하는 아버지를 감싸는 정상적인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김지영의 태도는 아버지의 시선과 달리 매우 얌전하다. 비약이 너무 심하다. 자신의 딸을 남의 집 딸 보듯 하는 태도는 아버지 개인의 인격적 문제이다. 이를 모든 아버지의 문제로 확대하지 말자.
감독이 남자들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남편의 눈물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남편이 보여준 자세와 남편이 흘리는 눈물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아내에게 흘리는 모든 남자의 눈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를 대하는 감독의 이중적 태도는 매우 불편하다.
3. 어떻게 해야 할까?를 말하는 감독
김지영의 고통에 대한 답은 김지영 스스로 풀어야 함을 영화는 말한다.
"누군가는 방법을 찾았겠죠.' 상담사에게 말하는 김지영의 대사 속에 문제를 풀 열쇠가 존재한다.
사실 이 영화는 설정상 허술한 부분이 너무 많다. 우선 종일 집안일 하는 아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집안일과 새장에 갇혀 사는 것 같은 김지영의 모습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김지영은 딸 하나를 둔 엄마이다. 딸 하나를 둔 김지영은 집안일에 치어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하는데, 집은 그리 깨끗하지 못하다. 이것이 김지영의 살림 실력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딸이 엄청 활동적이어서 매 순간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때문인가? 영화는 남자아이 둘을 둔 엄마의 생활을 설명해야만 한다.
운동이라도 해 보라는 공유의 제안에 김지영은 집안일 하기도 바쁘다며 시간이 없다고 거절한다. 종일 육아에 시달려 자기 자신을 가꿀 시간조차 없는 김지영이 아르바이트를 생각하거나 다시 회사에 다닐 준비를 하는 것은 모순되는 자세다. 일 할 시간은 충분하지만 자기를 가꿀 시간은 없다? 영화에는 이런 허술한 설정이 많다. 그래서 김지영이라는 캐릭터의 어려운 현실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아이를 키우며 어쩔 수 없이 생활 현장에 내 물리는 많은 엄마의 현실을 설명해야 김지영의 어려움도 일부분 이해될 것이다. 김지영이 딸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는 장면에서는 남자아이 둘 데리고 버스 타고 장을 보러 가는 엄마의 고충이 설명되지 못한다. 이 장면은 필자의 상상이 아닌 목격담이다.
결국, 이 영화는 당신의 태도에 대해서 말한다. 당신이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를 묻고 있다. 그래서 김지영은 자기 일을 위해 팀장을 찾아간다. 김지영이 말하는 경력단절 역시 허술한 설정 오류를 범한다. 작가를 꿈꾸며 국문학을 배운 김지영이 홍보회사에 합격했다며 좋아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나의 꿈과 나의 직업이 연결되지 못하는 현실을 깊이 있게 들여다 봐야 한다. 우리가 접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경력단절이란 용어는 로맨틱한 구호에 불과하다. 회사라고 하는 철저한 이익집단에서 경력 단절은 남, 녀를 가라지 않는다. 그래서 공유가 육아휴직을 망설이는 이유가 된다. 만일 김지영이 경력 단절을 걱정했다면 산책로에서 멍하니 앉아 발로 유모차나 밀게 아니라 공부를 해야 했다. 아니면 영화 말미에 나오는 자신의 꿈을 찾는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개인적인 노력은 전무한 체 단지 사회적 현실이 이러이러해서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김지영은 생활 형편이 어렵지 않다. 김지영뿐만 아니다. 아이를 키우며 집에 있는 전업주부가 독박육아 운운하는 것은 아이를 키우며 생활 현장에 내 물린 엄마를 우롱하는 처사다. 딸아이 하나다. 그 딸아이도 큰 문제가 없다. 게다가 오전에는 딸을 어린이집에 맡긴다.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 한 체 아내 가사를 돕는다.(불쌍하긴 남편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살면서 가끔 얼굴 보는 부산 사는 시어머니가 문제고, 일 년에 한 번 보는 고모가 문제고, 친정엄마나 친정 아빠가 문제다. 그러면서 영화는 김지영의 산후 우울증에 공감하라고 말한다. 대체 뭐가 문제야?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설정이다. 차라리 골치 아픈 남자애 둘이 있으면서 어려운 형편에 낮에는 일하고 오후부터 밤새도록 집안일하는 82년생 김지영이 영화에 나왔다면 어땠을까? 맞은편 동에 사는 시어머니는 하루가 멀다고 아들 챙기기에 바쁜 설정이라면 어땠을까? 결국 이야기는 나를 돌아보는 시선에서 출발하자고 한다. 그 누군가는 열심히 살 것인데 나는 왜 그동안 내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렸던가? 이 물음에 김지영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영화가 제시하는 답은 사회라는 조직에 있지 않고 나의 태도에 달렸다.
흔히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단호하다. "결혼은 선택이고 육아도 개인적 선택에 따른 결과다. 그래서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는 것에 반대한다."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절반은 틀인 말이다. 개인의 선택이 사회 문제로 회자 되는 것에는 필자도 반대한다. 만일 개인적 선택이 사회적 장치를 통해 해소되어야 한다면 수많은 개인의 선택에 사회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어야 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시선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문제가 만연한다면 이를 사회가 방치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기에 건강한 개인이 많아야 건강한 사회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자나 남자나 별반 다르지 않다. 불합리한 남아선호 사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제사상 역시 합리적인 대안을 찾는 사람이 많다. 명절이면 공항이 북적이고 관광지 숙소 예약이 어려운 것도 이미 사회가 변해가고 있음을 말한다. 변화하는 사회에는 여자도 있겠지만, 남자도 분명 존재한다.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사는 부모님이나 할머니는 그대로 두자. 현재를 살아가는 아내의 어려움에 과거를 소급해서 적용하지 말자. 그렇다면 이야기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고 이는 올바른 문제 해결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불합리한 상황을 아이에게 물려주지 말자는 것에 있다. 내가 상황을 바꿀 힘이 없다면 내가 상황을 바꿀 위치에 있을 때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본전 생각에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 보라는 의식은 칠거지악을 계승하는 자세와 같다. 할머니 세대는 할머니 세대대로, 어머니 세대는 어머니 세대의 몫으로 두고 우리는 우리 세대의 몫에 충실하자. 그것이 아이에게 전해줄 올바른 가치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해 눈물을 흘리는 신파에는 성공했지만 남자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말 연속극에 그친다. 단지 사회적으로 어려운 영화를 나름 잘 풀어낸 감독의 역량과 배우들의 찰진 연기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4. 나가는 말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미치는 파급력은 상당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여권신장과 연결된 영화라는 오해에서 비롯되어 많은 여성의 지지와 남성의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이런 비난과 지지가 아니라 오해이다. 영화 속 내용이 마치 페미니즘과 관련되어 있다는 시선으로 오해하여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은 오로지 여자의 피해 의식이 그 중심에 서 있다. 그것이 어떤 부분이며 어떤 형태로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는 방법론은 뒷전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여러 상황 중에서 제사 문화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근본주의 사회에 만들어진 문화는 현대 사회와 많은 충돌을 일으킨다. 유럽은 기독교 근본주의였던 시설 여자에게 자물쇠가 달린 쇠로 만든 팬티를 입혔다.(이를 정조대라 한다) 또한 '마녀'는 존재해도 '마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여자를 전리품 취급한다.(여자는 세 발 달린 솥과 보석과 함께 3가지 선물에 속한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또 어떤가. 이슬람 사회는 현대에서도 놀랄 만큼 여성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회교 근본주의인 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문화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를 인간 이하의 물건 취급하듯 했다. 오히려 조선 시대 여자가 상대적으로 더 우월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다.
제사 문화, 결혼 문화는 허례허식일 뿐이다. 조선 시대도 제사는 존재했으나, 제사 의례를 담은 <조례도감> <사례편람> <예서> <주자 갈>등 많은 문헌 어디에도 <홍동백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퇴계 이황은 퇴계 문집에 "음식의 종류는 옛날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이 똑같이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율곡 이이 또한 "제사는 각 집안의 형편에 따라 사랑과 공경을 다하라"고 했을 뿐이다. 매년 주요 언론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요 가문을 찾아 간소한 제사 문화를 기사화하고, 국가 기관인 성균관에서는 올바른 제사상에 대해서 홍보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홍동백서>로 시작하는 상다리 부러질 듯한 제사 음식이 바뀌지 않는 것은 막말로 그놈의 '효'의 기준 때문이다. 제사상 차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천하에 불효자로 매도당하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자식은 효자로 등극하는 문화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짜 양반들이 만든 경쟁 심리에 기인한다.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매관매직에 의해서 제대로 된 양반 의식 없이 오로지 돈만 밝히는 졸부들이 돈 주고 양반을 사서 만든 자본주의적 문화이다.
조선 인구가 가장 많았던 선조 때를 기준으로 조선 백성이 천만 명 남짓이었고, 이 중에서 5%인 오십만 명 남짓한 인구가 양반이었다. 이 양반도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니 5인 가구 기준으로 한다면 전국에 양반 가구가 겨우 일만 가구였다.(남.북한 포함이다) 일만 가구가 양반이고 나머지가 서민이니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을 차린 가구가 조선 천지에 몇 가구나 되겠는가. 혼례도 마찬가지다. 얼굴도 못 보고 시집가서 살림 차리는 게 일반적인 혼례였는데, 갖은 폐물을 보내고, 떠들썩한 혼례를 한 가구가 몇이나 될까. 몰락한 양반을 뺀다면 고을마다 양반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재 관혼상제는 페미니즘으로 잡 근할 문제가 아니라 허례허식으로 개선되어야 할 문화로 인식되어야 하겠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자칫 페미니즘으로 오해할 만한 상황이 너무나 많이 등장한다.
페미니즘은 무작정 여자의 권리를 높이자는 것이 아니다. 이는 피해 의식에 대한 보상 심리에서 기인한다. 페미니즘은 남자와 동등한 위치를 찾자는 것에 있다. 최근 성공적인 페미니즘 정책중 하나인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보자. 임산부의 어려움을 헤아려 배려석을 만들었는데 자세히 관찰하면 가관이다. 남자 승객은 모두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 두지만, 정작 임산부 배려석을 차고앉은 것은 나이 많은 여자들이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결국 여자를 위한 정책을 여자들이 방해하는 꼴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적 배려문화로 확산되어야 마땅하다.
여권 신장을 위한 활동에는 반드시 남자의 이해와 동의를 요구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남,녀 대결구도로 흘러가는 페미니즘은 더더욱 곤란하다. 남자와 여자가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야 할 세상에서 대결이 웬말인가? 특히 누구 묷을 빼앗거나 누구보다 더 나은 혜택을 보기 위해 살아야 하는 세상이 아니다. 물론 한탄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지만, 남자의 마음에 벽을 쌓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정반의 동의 없이 온전하게 변하는 것은 없다. 완전하게 독립된 주체자로 살지 않는 한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남자의 인권은 여자의 도움을 여자의 인권은 남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엘리자베스 앤더슨은 남성에 비례한 여성 평등 정책에 반대한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사람들을 처한 상황에 맞게 대우해야 하는데, 아이를 어른으로 대우할 경우 오히려 아이에게 해로울 수 있기 때문에 아이는 아이에 맞는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그녀는 차별 없는 대우는 평등을 실현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했다.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한 임산부 배려석도 마찬가지다. 존중을 바탕으로 한 임산부에 맞는 정책이 평등을 실현하는 올바른 정책이다. 이것이 '사회 정의'의 기본 논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회적 존중이 부재한 정책으로 인해서 임산부 배려석은 나이 많은 아줌마 전용석으로 변질되었다.
앤더슨의 주장은 존 롤스의 '정의론'과 일치한다. 예를들어 키가 다른 세 아이에게 똑같은 받침대를 준다면, 세 아이의 키는 여전히 차이가 난다. 진정한 '평등'을 위한 올바른 '정의'는 키가 큰 아이는 가장 작은 받침대를 주고 키가 가장 작은 아이에게는 가장 큰 받침대를 제공해서 세 아이의 키를 모두 똑 같이 맞추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서 세금을 똑같이 내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기 때문에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이 달라져야 한다. 이를 '차등의 원칙'이라 부른다.
결국, 페미니즘은 현재를 살아가는 82년생 김지영 뿐만 아니라 미래를 책임질 20XX년생 딸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올바르게 정착되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