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와 구하라
디케와 구하라
고대 그리스 신들의 왕 제우스와 율법의 여신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름은 디케(Dike)다. 디케는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았으나, 인간의 타락이 극심해지자 하늘로 올라가 처녀 자리가 되었다. 디케는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천칭을 들고 있다. 칼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엄중함을 뜻하고, 천칭은 다툼을 공정하게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디케는 오늘날 정의의 여신으로 불린다.
고대 그리스를 지나 로마 시대에는 여신 디케에게 형평성의 개념이 추가된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가 나타났다. 당시에는 이 여신도 정의의 여신으로 불렀다. 정의라는 말인 Justice는 Justitia에서 유래한 말이다. 정의의 여신을 디케라고 하든 유스티치아라고 하든 그 핵심은 엄중하면서도 공평한 판결에 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 대법원 앞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놓여있다.
정의의 여신을 그린 중세시대 그림을 보면 현재 여러 나라 대법원 앞에 있는 여신상과 다른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눈이다. 그림 속 정의의 여신은 눈을 뜨고 있지만, 대법원 앞 여신상은 눈을 가리고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을 심판하는 신은 자신이 가진 저울을 통해서만 판결을 내린다. 흔들리는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저울로만 판단한다. 죄의 무게에 따라 저울이 기울어지게 되니 그 무게만큼 판결을 내리면 된다. 자연과 질서를 창조한 신이 시비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죄의 무게와 관계없이 특정한 누구에게 더 유리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같기에 신은 항상 정의롭고 공정하다. 그러니 불편하게 눈을 가릴 필요는 없다. 이런 개념은 중세시대까지 내려온다. 왕은 신(하나님)이 임명하니 왕의 판결은 그 자체로 공정한 것이다. 물론 당시 판결이 실제 공정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현실적 판단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인간 역사가 근대를 넘어오면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다. 정교분리는 많은 변화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역할이 오롯이 인간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쉽게 타락하고, 불합리한 판단을 하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같은 인간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고민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철저한 법치주의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 법조차 인간의 손으로 만들기에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심판은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1월 25일 아이돌 가수 구하라 씨가 사망했다. 사망원인은 자살로 결론 났다. 보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많은 악성 댓글에 따른 우울증과 각종 구설수에 시달렸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전 남자 친구와 법정 다툼에 따른 스트레스 또한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연예인 생활을 했던 그녀가 댓글이나 법정 다툼만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어쩌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을까? 남자친구와 법정 공방을 벌였던 구하라 씨는 재판 도중 성관계 동영상을 보고 싶다는 판사의 말에 이는 2차 가해에 해당한다며 동영상 공개를 거부했었다. 실제 그녀는 눈물을 보이며 재판장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판사는 재판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증거라는 이유로 끝내 동영상을 시청했다. 그리고, 판결문에 두 사람의 성관계 장소와 횟수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재판 판결문은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그리고, 재판 과정과 결과는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혹시 침해당하지는 않는지 같이 고민해야 한다. 한 장의 서류가 피해자에게는 다른 형태로 제2, 제3의 가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동거했다는 기록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또는 성관계를 했다는 단순한 기록으로도 충분히 투명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판장은 재판 결과와 상관없는 성관계 장소나 횟수까지 판결문에 적시했다. 재판 결과는 법에 문외한인 우리가 논하기는 어렵지만, 재판 과정이 과연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는 얼마든지 짐작이 가능하다. 심지어 재판장이 구하라 씨의 성관계 동영상을 시청했다는 소식이 각종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날 모든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1위는 구하라 동영상이었다는 점에서 재판이 주는 사회적 파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피해자의 인권이 얼마나 유린당하였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개인의 의지인 개별의지를 모두 합하면 그것은 그 사회를 떠받치는 전체의지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전체 시민의 의지 중에서 오로지 공동체를 위한 것만이 일반의지라 했다. 일반의지는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에 일반의지에 따라 법은 만들어지고 집행되어야 한다. 전체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일반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법률은 그 국가를 대표하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므로 만인은 이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만일 어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면 그 법은 만인에 평등한 법이라 할 수 없다. 이 논리가 근대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회 계약론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는 법이 사람이나 지위고하에 따라 다른 결론을 내린 경험을 했던 과거를 기억한다. 독재 정권하에 벌어진 수많은 사법 살인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엄중했던 당시에는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와 군. 검찰이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법을 수호한다는 명목하에 많은 인권을 유린했었다. 당시 사법살인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특정인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현재는 어떤가? 법을 집행하는 판사 개인의 비뚤어진 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행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비록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증거라 할지라도 피해자의 인권이 철저히 유린되는 재판 과정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에 따른 결과가 피해자의 자살로 이어졌다면 이것이 바로 사법 살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대법원 앞에는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이 서 있다. 인간을 심판하는 역할이 여신의 손에서 같은 인간의 손에 들어온 이상 올바른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두 눈을 가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재판을 받는 당사자가 누구든지. 사회적 지위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오롯이 공정한 재판 과정과 결과를 위해서 눈을 가린 것이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판결의 유불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법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다른 형태의 폭력일 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법원 앞에 서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두 눈이 가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을 담당하는 정의의 여신은 무엇이 보고 싶은 것일까? 구태여 확인할 필요도 없는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눈가리개를 푼 것은 아닐까?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지만, 과연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지를 묻고 싶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는 인간의 재판을 재판관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정의의 여신에게 직접 맡기는 것이 더 공정한 과정과 결과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