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 들여다 보기(2)
2. 빨간머리 앤과 초록 지붕의 집
지난 게시글에서는 빨간 머리 앤의 활달함 뒤에 숨겨진 슬픈 현실을 들여다봤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처한 현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과 함께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해석하는 재미를 줍니다.
명랑 쾌활한 앤은 빨간 머리입니다.
매슈가 자신있게 말했다.
"빨간색이구나. 그렇지?"
여자 아이가 체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빨간색이에요. 이제 제가 왜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는지 아셨죠? 머리 색깔이 빨간 사람은 누구나 그래요. 전 주근깨나 초록색 눈이나 깡마른 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런 것들은 상상으로 지워 버릴 수 있으니까요. 화사한 장미꽃같이 발그레한 피부에 눈은 아름답게 반짝이는 보랏빛이라고 상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빨간머리는 도저히 상상이 안 돼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말이에요... 후략..."
빨간 머리는 앤에게 있어서 낙인과 같은 것입니다. 앤은 <초록색 눈> 정도는 <상상으로 지워 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초록색이나 빨간색이나 같은 색깔인데 눈은 지울 수 있지만 머리 색깔은 상상으로도 지울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일종의 각인과도 같은 것이죠. 마치 간통한 여자들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와 같은 개념입니다. 단지, 주홍글씨는 타인이 새긴 각인이지만 앤은 스스로에게 각인을 새겼습니다.
앤은 왜 빨간 머리를 불행의 상징처럼 여길까요?
빨간색은 정지나 금지. 위험과 경고를 나타냅니다. 부정적인 요소에 사용되는 색입니다. 또한 빨간색은 역동적이지만 자극적인 심리적 효과를 반영합니다. 강렬한 빨강은 사랑(심장이나 피)으로 표현되지만 반대로 분노와 복수를 뜻하기도 합니다. 다양하지만 복잡한 색인 거죠.
웩스너(Wexner, L. B.)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빨간색을 보호와 방어를 상징하는 색으로 선택했으며 이와 동시에 적대적인 감정을 나타 낼 때에도 빨간색을 선택했습니다. 그만큼 빨간색은 타인과 동떨어져 스스로를 가두는 의미로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빨간색은 창조적인 색체입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 개발에 많이 사용되지만 장시간 노출되면 생리 작용의 평행이 깨어져 혼란과 불안을 초래합니다. (박현일-색체 인문학)
빨간색은 에너지가 풍부하기 때문에 강한 힘이나 전쟁 혹은 권위의 상징과도 연결됩니다. 반대로 화나 광기와도 연결되죠.
빨간색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앤의 머리가 빨간색이고, 앤은 이 색을 자신을 규정하는 각인과도 같은 색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빨간 머리 앤이 입양되어 살아야 될 집은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나타납니다.
초록색은 인내심과 근면함의 상징입니다. 마치 빨간 머리 앤이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숙녀로 자랄 수 있도록 근면함과 인내심으로 양육한 <매슈 커스버트> 아저씨와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매슈는 말수가 별로 없지만 항상 앤 뒤에서 앤을 지지해주는 든든한 후원자입니다. 평생을 보수당 당원으로 살다가 앤을 위해서 자유당에 투표할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매슈는 항상 말없이 묵묵하게 있습니다. 매슈는 앤이 퀸학교를 졸업한 이후 전재산을 맡겨 놓았던 아베이 은행이 파산하자 그 충격으로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사망하기 전 날 앤에게 <내 딸>이라고 말할 만큼 과묵하지만 따듯한 감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매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초록색은 평화와 조화의 미이지가 있습니다. 기분을 온화하게 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거죠. 상냥하고 솔직하면서도 분쟁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을 많이 배려하는 색입니다.
빨간머리 앤이 초록 지붕의 집에 들어가 자신의 빨간 머리를 좋아하게 되는 성장 소설이라는 점에서 색깔이 가진 상징성은 매우 특별합니다.
빨간머리 앤과 초록 지붕의 집을 생각하면 2016년 개봉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이 생각납니다. 한 소녀의 머리속에 자리 잡은 감정을 의인화하여 벌어지는 사건을 재미있게 그려낸 영화인 <인사이드 아웃>은 소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다섯 가지 감정을 색으로 표현합니다. 버럭이는 붉은색으로, 까칠이는 녹색. 소심이는 보라색. 슬픔이는 파란색. 마지막으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쁨이는 살색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인 기쁨이는 살색이지만 머리 색깔은 슬픔이를 상징하는 파란색이었습니다. <기쁨의 뒤에는 슬픔이 항상 자리 잡고 있거나 기쁜 일은 슬픈 일을 이겨냈을 때 가지가 드러난다>로 해석될 수 있지만, 기쁨과 슬픔은 항상 공존하는 법입니다. 마치 빨간머리 앤과 초록 지붕의 집이 공존하면서 성장하듯이 기쁨과 슬픔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죠. 이런 의미에서 <빛을 그리려면 어둠을 먼저 그려야 하고, 어둠을 그리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는 밥로스 아저씨의 명언이 생각납니다. 그림 속에서 어둠과 빛이 반복되듯이 인생에서는 슬픔과 기쁨이 반복되는 것이죠.
빨간머리 앤에서 앤이 빨간 머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결국 초록색이 가진 인내와 조화 그리고 근면함과 편안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불안하고 슬프고, 어둡거나 화가 나는 수많은 상황을 이겨내는 것은 결국 가족의 사랑과 인내입니다. 이런 점에서 빨간머리 앤은 명랑 쾌활한 어린아이의 성장 소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소설입니다.
- 마릴라는 앤지 자랐다는 사실 앞에 야릇한
서운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아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대신 이렇게 키 크고 진지한 눈빛을 지닌 열다섯 살 소녀가 사려 깊은 얼굴로 당당하게 조그만 머리를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소설에서는 과거를 딛고 성장하는 앤을 보여주지만, 사실 성인인 마틸다 역시 앤과 함께 성장합니다. 마틸다는 늘 까칠하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엄격하고 고지식하며, 높은 도덕적 가치관을 갖고 있어서 항상 앤을 엄하게 대합니다. 사회성이 결여된 어른과 같은 일물입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의 마틸다도 앤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밝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어른들이 아이를 양육하면서 한 뼘 더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빨간머리 앤은 아이와 함께 어른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가족 간에는 사랑과 행복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우리는 그 방법을 모른 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빨간머리 앤은 우리에게 아주 쉬운 방법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어느새 훌쩍 자란 빨간머리 앤은 어느새 훌쩍 자라 버린 우리들 가슴에 아직도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