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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김춘수-꽃

(패밀리) 2019. 8. 6. 07:3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김춘수' 시인의 '꽃'에 대한 감상평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의 첫 부분에서 '그'라는 존재는 사람을 지칭하는 '그'가 아닌 관념적인 '어떤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생명체이든, 물건이든.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어떠한 것'을 이야기하든지 모든 것을 시인은 '그'로 지칭합니다.

 

어떤 대상을 부를 수 있는 단어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존재는 '그 어떤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도 이를 무엇이라고 부르는 단어가 없을 경우에는 단지 '그 어떤 것'에 불과한 거죠. 예를 들어 갈색 기둥에 연녹색의 작은 물체가 많이 달려있는 존재를 '나무'라고 부르기 전까지 그 물체는 '어떤 것'에 불과합니다. '잎'이라고 부르는 단어(이름)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잎'도 '어떤 것'으로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 나타나는 바를 시인은 '하나의 몸짓'으로 표현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특징이 '하나의 몸짓'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시인은 몸짓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모든 사물에 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리킬 때 어떤 형태나 움직임을 몸짓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몸짓은 행위의 제한이 있기때문에 대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함축해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대상이 세분화 디지 못하고 어떤 부류로 크게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사람을 혈액형으로 나눈다면 네 가지 분류 안에 모든 사람이 포함되게 됩니다. 각 개인의 개별적 존재가치가 희석되는 것이죠.

 

실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을 좋아하는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 감정은 '그 어떤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벽을 만듭니다. 소통의 부재로 나타나는 거죠. 모든 대상을 단지 '어떠한 것'으로 부르면 소통에 큰 지장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생각으로만 가능한 '~것'이 인간 상호 간에 공감적 관계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지칭하는 무엇-이름'을 '그 어떠한 것' 대신에 불려야만 비로소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태어남을 뜻합니다. 이른바 인간 상호 간에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그의 이름'입니다.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는 작업은 실제 인간의 역사(진화 과정)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 그들은 음성의 억양을 늘리고 거기다 몸짓을 더했다. 몸짓은 그 본성으로 봐서 한층 더 표현적일 뿐 아니라 그 뜻이 이전의 결정에 의존하는 정도가 작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움직이는 물전을 몸짓으로, 청각에 호소하는 물건을 모방음으로 표현했다 ...중략... 몸짓은 주의를 환기하기보다도 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므로, 마침내 사람은 몸짓 대신 음성의 분절화(음성을 음절로 구분 지어 발음하는 일)를 생각해 냈다. -루소:인간불평등기원론***

 

현실에 물체로 존재하지만 이러한 물체를 완전하게 현실 상태로 소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행위는 원시 인류가 언어를 구현해 내는 상태를 생각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원시 인류가 어떤 나무를 가리켜 '소나무'라고 부른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인류가 자신이 보고 있는 나무와 '소나무'라고 이름 붙인 인류가 가리킨 나무와 동일한 나무를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반드시 일치하는 정보가 있어야만 그것이 비로소 '소나무'가 됩니다. 나무를 가리키며 '소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와 이를 듣고 보는 다른 사람의 나무가 같은 나무가 아니라면 처음 이름 붙여진 나무는 온전히 '소나무'가 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상호 간에 물체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모든 것이 서로 일치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나타나는 발전된 현상입니다. 이 과정에는 수많은 오류를 수정하고, 동의하는 세부 과정이 반드시 포함된 것이니 '이름'을 만들어서 붙인다는 것은 물체가 단지 시간과 공간 속에 실존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창조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하는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뿐만 아니라 실존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 그 감정은 단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할 정도로 의미 없는 감정에 불과합니다. 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타인도 나와 같은 감정을 '사랑'으로 인식해야만, 그 감정은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세계에 살아나게 됩니다. 만일 내가 느끼는 현재 나의 상태(감정)를 나는 '사랑'이라고 타인에게 전달해도 타인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 상태를 '사랑'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나와 타인 사이에서는 '사랑'이 현실적인 감정으로 나타날 수 없게 됩니다. 흔히 내가 '사랑'이라고 느낀 타인의 감정을 타인은 단순히 '좋아함'으로 생각해서 나타나는 오해가 이런 경우입니다.

이런 행위는 '본질'을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꽃이 되었습니다.

 

'꽃'이라고 하는 어떤 것을 '꽃'으로 부르기 전에는 그것은 그냥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물에는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만일 '꽃'은 '아름답다'라고 한다면, '꽃'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아름다움'은 '꽃' 말고도 많죠. 하지만, 많은 아름다움 가운데에서 '꽃'이 갖는 고유한 아름다움은 꽃에만 존재합니다. 만일 꽃이 갖는 아름다움을 내 손에서도 느낄 수 있다면 꽃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그만큼 떨어지겠죠. 우리는 꽃을 찾아볼 필요 없이 그냥 손바닥만 바라보면 그만이니 꽃은 존재 가지가 떨어집니다. 그렇기에 '아름답다'라는 반드시 '꽃'이라고 할 수 없지만 '꽃'은 '아름답다'와 연결됩니다. 이는 꽃의 본질 중 하나가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꽃'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적 의미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어떠한 것의 근본적인 본질은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며, 인간은 이런 근본적인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상의 세계(이데아)에서만 존재하는 데 현실적인 모든 것들은 이러한 상상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만일 현실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면 나머지 개체는 모두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됩니다. 대기업 회장이 절대적인 부자라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 존재 의미를 부여합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고유한 성질을 본성이라고 본다면 그러한 고유한 성질을 유지하고 그것에 맞게 존재할 때 그 사물은 비로소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자유로운 개체로 살아가려면 그 자체의 근본적 본질을 유지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아이는 아이 다울 때 비로소 자유로운 아이가 되는 것이죠. 어른은 어른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자가 말 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논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본질을 추구하고 이 본질에 대해서 성찰하는 이야기는 종교 속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불교의 '다 하소 불'이야기나 예수가 나를 따라 하지 말라.라는 말은 믿음의 본질은 불상이나 예수가 아니라 믿는 자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죠.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올바르게 따를 때 비로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해 주는 깊은 의미를 지닌 시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성형을 할 게 아니라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나에게 와서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돈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본질적인 행복을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나와 나의 가정에 행복이 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물질에만 빠져있는 현재를 비판하고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큰 울림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첫 두 부분이 시의 모든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것'을 '그'로 표현하여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는 그의 몸짓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의미가 부여된 꽃으로 탄생합니다. 이제는 내가 꽃이 될 차례입니다. 이는 상호 의존에 따릅니다. 내가 존재하는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않던 그에게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어 그를 실제로 존재하는 꽃으로 만들었다면 반대로 나 역시 그에게는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결국 그 역시 나에게 맞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도 실제로 존재하는 꽃으로 탄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상호 의존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사회집단을 형성하고 난 이후에 인간은 사회집단 속에서 다른 존재와 연대를 맺지 않은 완전한 독립된 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공동체 의식은 인간 생활에 필수적입니다. 내가 너에게 알맞은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너도 나에게 알맞은 이름을 불러서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의미로 남고 싶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해야 됨을 뜻합니다. 정의가 실종된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정의'라는 것에 알맞은 실천입니다. '정의'라는 말은 존재하지만, 이를 올바르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정의'는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고 결국 '정의'는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처럼 변화하는 세상 속에 왜곡되고 의미가 퇴색된 것들에게 올바른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더불어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그것이 발현될 때 비로소 꽃이 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개별 존재의 실천 문제입니다. 타인에게 알맞은 의미를 부여함은 타인에게 부여된 의미에 상응하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나'역시 나의 역할에 맞는 '~ 다움'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극히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거죠. 타인에게 엄격하고 스스로에게 온건한 도덕적 잣대야말로 가장 비도덕적 행위의 기초라는 점에서 나도 나에게 맞는 '~다움'을 실천함으로써 그에게 가서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품은 꽃'이 되고 싶다고 했으니 나 역시 '~다움'을 실천하고자 함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운' 존재가 되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짧은 시 속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보면 하나의 거대한 철학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근본적인 본질이 퇴색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깊은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