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와 다수. 무엇이 소수로 만드는가?
세상에는 어떤 의견에 찬성하는 다수가 존재하고, 이와 반대로 특정 의견을 말하는 소수가 존재합니다. 여기서 찬성을 전제로 하는 의견이 다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수가 찬성하는 의견이 결정되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소수의 의견은 일반적이지 않은 특수한 의견으로 치부되어 가치 없는 소리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이런 다수와 소수라는 개념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소수를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수나 소수는 누군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많은 사람이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결정으로 이 개인의 합에 따라 발생하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결정하는 선택지에서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특정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아으면 당연히 다수가 형성되고, 반대로 다수의 선택에 비해서 적은 숫자로 특정 선택을 하는 사람의 생각이 모여서 소수 집단을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논리가 틀리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다수에 의한 결정에 익숙해져 있기에 다수와 소수가 만들어지는 방식이 수치적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이미 익숙한 방식인 숫자에 다른 결정을 벗어난 다수와 소수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카락의 길이와 성적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으니 학교에서 두발을 자율화해야 한다는 다수 학생들 의견이 있는 반면 머리가 길면 학습에 방해되기 때문에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소수 선생님의 주장이 상반되는 학교가 있습니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수와 소수의 논리라면 학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학생들 의견에 따라 두발 자율화가 실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두발을 제한하는 선생님의 의견(소수의견)이 선택됩니다. 이런 현상은 가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수 의견보다는 아버지라는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이 더 크기 때문에 아버지의 의견이 마치 집안 전체 구성원의 의견으로 결정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죠. 경직된 국가일수록 권력을 독점하는 소수 의견이 마치 국가를 대표하는 다수 의견처럼 포장되기 일수입니다. 권력을 독점한 소수는 국민의 결정이라는 포장지를 이용해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입니다.
사회는 다양한 인간이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기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발전된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의견을 취합해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고 모두가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소수로 분류되는 생각과 의견들은 철저히 외면받습니다. 이들도 알고 보면 사회 집단의 일원이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개인인데 말이죠. 그래서, 필요한 것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장치입니다. 소통을 통해서 서로 이해하고 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이죠. 이 절차가 필요한 이유는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이나 집단의 다름을 처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위계로 해석하는데 익숙합니다. 과거 독재 정권에 오랫동안 노출되고, 교육받은 후유증인 거죠. 위에서 예로 들었듯이 아버지의 결정이나 선생님들의 의견은 권력의 특수성에 따라 다수로 포장됩니다. 더 넓은 집단인 국가를 들여다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계에 의해서 다수의 의견이 소수로 바뀌어 양상 되는 현실은 무수히 많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소수자는 자신의 의견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서 미디어나 여러 홍보 수단을 통해서 다수 의견처럼 만듭니다. 결국 소수 의견은 다수 의견으로 바뀌고 대 다수를 차지하는 국민의 의견(다수 의견)은 소수 의견처럼 뭍혀버립니다. 특히 권력자는 자신을 국가 행정을 수행하는 위임자가 아닌 국가를 통치하는 대표자로 생각하여 사적 의견을 사회 보편적 의견으로 착각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개인 생각을 전체가 동의하는 의견으로 만들기 위한 불법적 행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의견은 특정 소수로 치부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탄압합니다.
과거 권력자가 소수를 만드는 방법은 국가를 인간처럼 생명체화 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국가와 결혼했다는 18세기 영국의 앤 여왕처럼 권력자 스스로가 국가로 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국가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인권이 있듯이 국가에 국권이 존재하게 됩니다. 당연히 국권이 인권에 우선하게 되고 시민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마치 국가가 존재해야만 우리가 존재하니 국가를 위한 희생은 당연한 절차이다. 국가는 사람으로 따지면 머리가 되는 것이고, 시민은 팔이나 다리가 되는 것이니 필요하다면 머리가 살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정도 잘려 나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오래 노출되면 우리 일상에서도 권력에 의한 다수와 소수가 쉽게 만들어집니다. 어떤 의견이 충돌 할 때 나의 생각은 보편적이지만 상대의 생각은 특수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 행태의 이면에는 소수에 대한 혐오 반응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팩트라고 하면서 상대의 이야기는 개소리로 치부합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찾아보면 강자에 대한 개별 시민의 동경심에 있습니다. 독재에 오래 노출된 시민은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동경하게 되고 이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욕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 어린이 들의 미래 꿈이 대부분 대통령이었던 것이 권력에 대한 욕망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시민 사회를 태동 시켜본 경험이 없기에 발생하는 현상 중 하나입니다. 사회 주류에 편입된 일부 계층의 시민은 철저히 계급적 투표를 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나 미래 국가를 위한 비전과 정책을 비교하여 자신에게 맞는 투표를 행사하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욕망에 이끌려 투표 합니다. 그 욕망에 따른 투표가 마치 자신이 주류에 속해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위력과 계급주의에 따라 만들어진 다수는 대체로 소수를 억압합니다. 이런 억압에는 집단적 혐오가 발동합니다. 인간의 가장 원시적 생존 감정인 혐오에 기대어 소수자나 소수 집단을 구분 짓고 억누르는 것이죠. 이런 집단적 혐오는 쉽게 공포화됩니다. 인간은 생존 하기 위해서는 위험한 상황을 미리 인지하고 이를 공포화해서 비슷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고, 종족이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떤한 위험이나 공포는 혐오라는 감정으로 바꾸어 집단 속에 저장됩니다. 그래서 집단적 혐오는 개인에게는 공포로 쉽게 변환됩니다. 대표적인 게 백인들의 인종차별입니다. 유색인종을 혐오스러워하는 집단 혐오 현상은 개인에게는 소수자가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본능적 자극을 유발합니다. 사회적으로 특정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소수자와 혐오의 연관성 없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혐오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구조적 취약함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저항을 민주주의라는 포괄적 개념에서 바라보지 않고 특수한 이익집단 혹은 개인의 떼쓰기로 비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국가 주권은 구조적으로 분권화되어 있지만, 시민의 생각은 아직 분화되지 못한 것도 원인 중 하나입니다. 특정 주권이 국가를 형성하지 않듯이 국가 주권을 대표하는 주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를 대표하는 주권 개념을 가지려고 합니다. 개인이 무시되고 소수가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민주적 소통은 사라지고 목소리 큰 사람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원시 자연상태와 같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이런 논의의 실종은 많은 소수자를 거리로 몰아냅니다. 누군가는 거리를 행진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굴뚝 꼭대기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삶을 마감하는 소수도 생겨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사회적 소수자입니다. 이를 사회적 약자라고 표현합니다. 기득권자가 만든 다수에 포함되어 관심받고 싶은 소수자 일 수도 있겠지만 권력은 다수의 소수자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부는 시한부 인생을 살지만 국민은 영원한 삶을 사는 관계로 국민이라는 다수자는 끊임없이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보다 대 다수를 차지하는 소수자의 현실에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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