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습작 노트/▷ 정치 사회 역사

수용소를 탈출한 이유

(패밀리) 2022. 6. 6. 09:14

“내가 어디에 있든 케냐 산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 펠리페 베누치

펠리페 베누치는 191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알프스 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트리에스테에서 살았던 만큼 줄리앙 알프스와 돌로미테는 정말 말 그대로 제 집 드나들듯 올랐습니다. 20대 초반에는 수영 선수로도 활동했습니다.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뽑혀 국제 대회에 출전할 만큼 나름 수영 실력을 인정받은 편이었죠. 그는 로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싶다는 꿈에 식민지청에 지원하여 합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발령된 곳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였습니다. 당시 이곳은 이탈리아군이 점령하고 있었죠. 그런데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전쟁의 소용돌이가 아프리카까지 휩쓸게 되었고, 1941년 아디스아바바가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며 베누치는 케냐 나뉴키 제354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케냐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성격처럼 수용소 생활도 매우 유쾌하게 지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용소 생활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죠. 그렇습니다. 그는 “포로들에게 시간이란 일종의 적(敵)”이라 표현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 즉 언제 이 망할 놈의 전쟁이 끝날지도, 언제 포로수용소에서 나가게 될지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포로들에게는 어둡고 암울한 현재만이 존재했던 것이죠.

장마철로 후덥지근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는 와중에 한 막사에서 스무 명이 함께 부대끼며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한순간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죠. 그로 인해 옆에 있는 동료 포로들에 대한 짜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점에 펠리페 앞에 케냐 산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아프리카 대지의 향이 콧속 깊숙이 전해지며,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황홀히 아름다웠던 그 산 봉우리는 별빛 아래에서는 더더욱 빛나는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하얀 빙하는 신비스러운 빛을 발하며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고, 멋들어진 정상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진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네, 케냐 산에 오르겠다는 꿈을 꾼 거죠. 그러자 더 이상 시간은 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이 얼마나 황당한지는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꿈이 생기자, 삶은 또 다른 흐름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 못지않게 ‘미친놈’을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결국 귀안과 엔초를 만나게 됩니다. 세 사람은 배급받은 깡통 뚜껑에 산을 스케치합니다. 수용소 철조망을 조금 잘라내서 아이젠도 만들죠. 고철과 넝마, 잡동사니들을 줍고 훔치고 뺏어서 등산 장비를 직접 만들고, 피 같은 담배와 바꿔가며 식량을 비축한 끝에 1943년 1월 24일 드디어 수용소 탈출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생길은 그제야 시작됩니다. 동료 한 명의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이죠. 결국 그는 높이가 제일 높은 바티 안봉(5199M) 대신 레나나봉(4985M)를 등반하기로 목표를 바꿉니다. 그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장비와 식량을 들고 겨울 아프리카의 높은 산을 기어오릅니다. 정상에 도달한 세 사람은 빨간색과 녹색, 하얀색 천 조각을 기워만든 이탈리아 국기를 휘날립니다. 그리고, 2월 10일 세 사람은 제 발로 수용소로 복귀합니다. 세 사람은 수용소를 무단이탈한 죄로 독방 28일 형에 처해지지만, 수용 소장은 7일로 기간을 단축시켜 줍니다.  

 

펠리체의 작은 영웅담은 무모한 도전을 현실로 만드는 집념과 목표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긍정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힘.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찾는 노력. 주변 상황이 변했을 때 목표를 수정할 수 있는 과감한 결단력. 어쩌면 이런 모든 힘은 긍정적인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펠리체 베누치의 글은 고난을 돌파해 나오는 유머의 힘으로 인간의 꿈과 자유, 영혼의 순결한 힘을 이야기한다”(소설가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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