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습작 노트/▷ 종교 철학

동양 고전과 조직문화(3)-도덕경과 리더십(세 번째: 대기만성-大器晩成)

(패밀리) 2021. 12. 5. 16:39

동양 고전과 조직문화(3)-도덕경과 리더십(세 번째: 대기만성-大器晩成)

 

-지난 이야기-

<지극히 참된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참으로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거처한다. 고로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機於道)- 도덕경 8장>

<(물과 같은 사람은) 땅처럼 참되게 머물고, 참된 마음이 깊은 연못과 같고, 참되게 사람을 맞아 어질고, 참되게 말하여 믿음이 있고, 참되게 정사를 보아 다스리고, 참되게 일을 보아 능통하고, 참되게 움직여 때에 맞으며, 오로지 다투지 않으므로 원망이 없다. (居善地 心善淵 輿善人 言善信 政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도덕경 8장>

 

 

도덕경에 나오는 여러 말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사자성어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이 있습니다.

 

<큰 모양은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음은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 도는 규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깃들어 있다.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도덕경 41장>

 

위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대기만성(大器晩成)>이 아니라 큰 그릇에 대한 고찰입니다. 큰 그릇은 너무 크기 때문에 모서리가 없습니다. 큰 그릇의 모서리를 뾰족하게 만들면 쉽게 부서집니다. 그 이유는 모서리가 뾰족하게 각을 이루면 내용물의 무게로 인해서 부서지기 쉽습니다. 물론, 두께를 엄청나게 두껍게 만들면 충분히 견딜 수 있겠지만, 두께를 줄이는 대신 담겨있는 물건의 하중을 충분히 견디려면 모서리가 둥글게 되는 것이 그릇의 강도를 높이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큰 그릇일수록 <모서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둥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릇이 거대할 정도로 커지면 모서리가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 지구를 예시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지구는 인간의 기준에서는 너무 크기 때문에 둥근 모양도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는 평평한 면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그릇의 크기가 클수록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서는 모서리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릇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형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르게 생각하면 큰 그릇은 모든 형태의 사물을 다 담을 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깊어서 낮음에도 만물의 우두머리 같고, 맑음에도 무언가 있는 것 같구나.( 道, 沖而用之, 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湛兮似或存.)도덕경 4장>

 

도덕경 4장에도 비어있는 큰 그릇을 이야기합니다.장 내용과 4장 내용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릇은 속이 비어야 그 쓰임이 있습니다. 가득 찬 그릇은 물건을 더 이상 담을 수 없습니다. 발전 가능성이 없는 것이죠. 큰 그릇일수록 큰 물건이나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비어있는 공간도 넓어야 합니다. 그릇은 큰데 가득 차 있으면 한 방울의 물도 더 담을 수 없습니다. 결국 큰 것을 담거나 많은 것을 담으려면 그릇의 크기와 비어있는 공간의 크기 둘 다 중요합니다.

 

어떤 조직에는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존재합니다.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열심히 일한다 할지라도 생각이 다 다르고, 행동하는 모양이 다릅니다. 어떤 특정 기준을 만들어 그 속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면, 목표를 이루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매뉴얼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그 중간 과정을 처리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즉 매뉴얼을 충실히 따른다고 할 지라도 일을 추진하는 세부적인 과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큰 그릇이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쉽게 예를 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동차로 가는 목표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중부 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합니다. 중앙 고속도로도 있죠. 아예 국도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차가 논두렁을 달리거나, 인도로 가지 않는 이상 어떤 경로로 달리던 운전자마다 자신에게 편한 경로가 따로 있습니다. 또한, 도로 위에서 2차선만 고집할 필요도 없겠죠. 도로교통법을 잘 지키는 범위에서는 3차로나 1차로를 달려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 없이 안전하게 부산까지 도작하는 일입니다. 만일 직책자가 특정 고속도로나 특정 차선만 고집하기를 요구한다면, 그 만큼 조직은 경직되고,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의 운전 스트레스는 심해집니다.

 

노자는 직책자라면 다양한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큰 그릇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함량(含量)>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 사람의 크기를 <함량 含量)>으로 표현하는데 이 함량이 바로 그 사람이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의 함량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비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모든 의견을 무조건 비판 없이 수용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기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이를 적절히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자신과 더불어 타인이 같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그 사람의 함량에 대한 높은 평가로 귀결됩니다.

 

근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S Mill)은 자유론에서 많은 토론을 거치고,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했습니다. 개인의 자신의 생각만이 오로지 진실이나 진리라는 틀에 갇히게 되면 인간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모래에 묻혀있는 금을 얻으려면, 이를 체에 고르는 일이 필요합니다. 체의 간격이 좁으면 좁을수록 높은 순도의 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금은 좋은 결과물이고 체는 여러 사람의 생각과 의견입니다. 단 한 사람이 반대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서는 발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열린 토론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순도 높은 금을 얻기 위해서 체에 거르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경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학자인 왕필이 쓴 <왕필본>이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왕필본>보다 오래된 기원전 2세기경 전-한 시대의 무덤인 마왕퇴에서 비단에 쓰인 도덕경인 <백서본>이 발견됩니다.이 백서본에 <대기만성(大器晚成)>이 <대기면성(大器免成)>으로 쓰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왕필이 <면(免)>이라는 글자를 <만(晚)>으로 잘 못 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기만성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인데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큰 그릇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부처가 25살에 해탈했으니 대기만성은 아니었던 것이죠. 예수나 마호메트도 젊은 나이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마찬가지죠.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큰 인물이 반드시 늦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대기면성>은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로 해석이 됩니다. 보통 사람이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른바 <꼰대>가 될수록 그 사람의 그릇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정해진 그릇의 크기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상상하는 한계를 뛰어넘는 그릇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그릇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이치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다 담아야 한다면 함량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릇의 크기는 무한대에 가까워집니다.이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어린아이의 창의력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됩니다. 아이가 큰 그릇으로 성장하려면,생각의 크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야 합니다. 어른의 생각이 이미 좁은 틀 속에 갇혀버린 작은 그릇이라면, 어린아이의 그릇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어린아이의 상상을 부모의 작은 틀 맞추려 한다면, 아이는 그만큼 작은 그릇으로 크겠죠. 큰 그릇은 결코 완성되지 않듯이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려면 한계를 정해두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환경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살아남으려면 어떤 특정한 기준에 모든 사람을 끼워 맞추는 것보다 유연한 사고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함량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