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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 앤 들여다 보기(1)

(패밀리) 2021. 12. 20. 12:34

빨간머리 앤 들여다 보기(1) 

 

빨간머리 앤은 말 많고, 유쾌한 여자 아이의 성장 드라마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빨간머리 앤이 전달하는 훈훈한 이야기는 소설이 처음 발표된 1908년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시대나 세대를 뛰어넘는 이야기와 앤의 화법은 소설 주인공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빨간머리 앤은 성장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 대한 평가는 앤이 보여주는 겉모습에 많이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나열된 많은 요소들은 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다소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가 보이는 외면이 아닌 내면을 이해함으로써 소설을 폭넓게 해석하는 시야를 넓히도록 하겠습니다.

 

1. 빨간머리 앤의 내면

 

 앤은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무한 상상력은 앤의 긍정적 에너지를 항상 높은 상태로 유지시켜줍니다. 창의성이 빛날 것 같은 앤의 이런 긍정 에너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슬픈 현실을 먹고 자랐습니다. 부모의 죽음으로 앤은 다른 집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것이 아니라 마치 가사 도우미와 같은 양녀로 입양됩니다. 말이 입양이지 허드렛일을 하면서 제대로 된 처우를 보장받지 못하는 어린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합니다.

 

당시 서구에서는 아동 노동력 착취가 극심했습니다. 아동은 성인에 비해서 식량 소비가 작고, 품삵을 전혀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을 제공합니다. 게다가 양부모는 아이가 자라면서 중세시대 노예와 같은 형태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소유물이었습니다. 잘 길들이면 앞으로 수 십 년은 든든하게 부려먹을 수 있기에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는 관행이 빈번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양녀로 입양당한 처지의 코제트는 아동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체 극심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  또한,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올리버 역시 구빈원에서 살다가 탈출했는데, 당시 구빈원은 근대 초기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 설치한 정부 집단 수용소중 하나 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아원으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실제로는 구빈원에서 탈출했습니다.

 

근대화 시기 아동 노동력 착취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알아보면, 영국 방적공장 견습공 책임자였던 존 모스가 1816년 영국 의회에서 아동 노동에 대한 증언에 따르면 런던에서 온 아이들은 7살에서 11살 정도였고, 리버풀에서는 8살에서 15살 사이의 아이들이 새벽 5시부터 밤 8시까지 하루 15시간의 극심한 중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833년 공장 수선공으로 일했던 11살의 토머스 클라크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잠이 들면 가죽 끈으로 때렸습니다.... 나는 아침 6시가 조금 못 돼서, 때로는 5시 공장에 나가서 밤 9시까지 일했습니다... 내 동생이 나를 돕고 있습니다. 그 애는  7살밖에 안 되었습니다... 나는 동생을 아침 6시에 데리고 나가서 밤 9시 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빨간 머리 앤의 도입부는 앤의 심리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당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 매슈 오라버니는 브라이트 리버 역에 갔답니다. 노바스코스에 있는 고아원에서 남자아이 하나를 데려오기로 했는데, 오늘 저녁 기차로 온다고 해서요."

 

- 마릴라는 노바스코샤에 있는 고아원에서 사내아이를 데려오는 게 마을에서 처음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 아니라, 에이번리의 어엿한 농가에서 봄이면 으레 하는 일이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 어느 날, 알렉산더 스펜스 부인이 집에 들러서는 봄에 호프타운 근처 고아원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올 거라고 하더군요... 중략... 그리고, 남자아이를 입양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알다시피 이제 오라버니도 늙으셨어요. 벌써 예순인 데다 기력도 예전만 못하시고요. 심장도 안 좋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랍니다. 일꾼 구하는 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인지 아시잖아요. 멍청하고 어정쩡한 프랑스 사내애들 말고는 없다고요.... 후략..." 

 

결국 부모를 잃은 개인의 불행에 더해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회 현상은 앤의 성격을 현실 도피적인 상태로 만듭니다. 앤의 상상력과 수다는 끔찍한 현실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죠. 앤의 현실을 이해한다면, 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어린 여자 아이의 깜찍한 수다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앤은 자신을 스스로 꾸민 가상의 세계에 가두려 하는 것이죠. 

 

"그래도 고아원은 정말 끔찍해요, 넉 달 밖에 안 있었지만 그걸로 충분해요. -중략- 정말 상상도 못 할 만큼 지독한 곳이라고요. -중략- 거긴 고아들 빼곤 상상할 거리가 전혀 없어요.-중략- 전 예쁜 옷을 입어 본 기억이 없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바라는 거겠죠. 그렇죠? 전 멋있게 차려입은 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요. 오늘 아침 고아원을 떠나면서 이 끔찍하고 낡은 원피스를 입어야 해서 정말 부끄러웠어요. 고아들은 모두 이 옷을 입어야 해요. 기차에 탔을 때는 사람들이 전부 절 쳐다보며 불쌍해하는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전 곧바로 제가 아주 아름다운 연하늘 실크 드레스 입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어차피 상상할 바엔 멋있는 게 더 좋으니까요."

 

 "고아원에는 나무다운 나무가 전혀 없었어요. 고아원 앞쪽에 볼품없는 작은 나무 몇 그루와 그 주변에 나무처럼 꾸며놓은 작은 조형물이 고작 다였죠."

 

"저 집을 보는 순간 우리 집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 정말 꿈만 같아요. 제 팔꿈치는 지금 시퍼렇게 멍이 들었을 거예요. 오늘 몇 번이나 꼬집었는지 모르거든요. 끔찍한 기분이 잠깐씩 들 때마다 모든 게 꿈이면 어쩌나 겁이 났어요. 그래서 진짠가 아닌가 보려고 꼬집었던 거죠. 그러다 문득 이게 꿈이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먹을 수가 없어요. 전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거든요."

 

앤의 기쁨 뒤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거의 고통과 우울한 생활은 슬픔이 되었고, 스스로 그 슬픔을 치유하지 않으면 결코 기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선택권이 부재한 현실에서 앤은 오직 상상을 통해서 스스로 슬픔을 치유합니다. 어느 누구도 앤의 슬픔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슬픔을 쓰다듬어 주지 않았죠. 그렇기에 앤은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앤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망치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한다고 모든 슬픔이 치유될까요? 상상만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상상을 펼치기보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자신을 몰아넣습니다. 염세주의적 태도를 보여서 어른인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어서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에서 벗어납니다. 앤의 자기 치유법은 <레미제라블>의 코제트와도 닮아있습니다. 앤은 과거의 회상이지만 코제트는 현재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코제트의 모습이 더 처절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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