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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

(패밀리) 2021. 9. 29. 09:06

그레고리는 어느 날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곤충으로 변한 것을 발견합니다. 주인공은 변화한 것이 아니라 변신한 것이죠. 여기서 변신이라는 제목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그레고리가 변하는 과정은 생략된 체 곤충으로 바뀐 상황만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변화와 변신은 엄연히 다릅니다. 변화는 바뀌어가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이 가능합니다. 서서히 변하든 빠르게 변하든 타자가 변하는 대상을 관찰하고 인지 가능하기에 변화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우리가 체득하는 자연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변신은 느닷없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변화가 모두 완료되고 난 다음에 그 상황을 맞이하면, 타자는 그것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변신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주인공 그레고리가 변화한 것이 아니라 변신한 것은 주인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가족의 시선에 있는 것이죠. 책에도 나와 있듯이 주인공은 홀로 가정을 책임지는 그 순간부터, 혹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외부 영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변화는 주인공의 바람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레고리가 자신의 변신한 모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묘사에서 집착할 수 있는 거죠. 그레고리는 상상하던 자신의 모습이 결국 현실로 나타나자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습과 환경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레고리는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속박되는 순간부터. - 가족에 의해 자신의 삶이 내 몰리는 순간부터- 변화를 간절히 소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레고리의 가족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그레고리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시기와 그레고리가 변신하고 난 다음의 태도. 그리고 그레고리가 죽고 난 이후의 모습을 통해 주변 환경이나 상황이 변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적응하는지를 우리는 파악하게 됩니다. 결국 그레고리는 변신 했지만, 소설에는 가족의 변화를 더 비중 있게 다룹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난 이후 가족은 온전히 그레고리의 벌이로만 생활합니다. 모순되는 것은 그레고리의 벌이가 충분했기 때문에 다른 가족은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한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가족들은 그레고리가 제공하는 안락함에 젖어 그 편리함의 우리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죠. 마치 스스로 길들여지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생활은 그레고리의 생각이나 의지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레고리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어깨에 올라탄 모든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과 의무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레고리의 이런 사정을 가족들도 모르는 바는 아녔는지도 모릅니다.그렇기에 그레고리의 변신에도 가족은 모두 이해하는 반응을 보였죠. 가족이 처음 보인 반응은 매우 친절하고 감성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선택적 걱정입니다. 그레고리가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본인들은 현재의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기 어렵기에 더없이 너그럽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것은 가족 공동체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따라 구성원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현재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외벌이 집안의 경우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의 계급 관계는 명확합니다. 또한, 아내의 벌이가 부업 혹은 알바와도 같은 형태이어도 마찬가죠.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절대 존재와 그 아래서 살아야 하는 가족과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소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극적인 예로는 1980~90년대 세계 최고의 여자 가수로 손꼽는 휘트니 휴스턴의 삶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휘트니 휴스턴이 세계적인 가수로 성장하자 그 가족은 모두 휘트니 휴스턴의 벌이에만 전적으로 의지한 체 살아갑니다. 심지어 오빠는 전도유망한 프로 농구 선수였음에도 농구를 그만둡니다. 모든 가족은 휘트니 휴스턴이 제공하는 안락한 집과 먹을거리 속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생명을 갉아먹습니다. 이런 예는 현재에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그레고리를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삶으로 내 몰았다면, 그레고리의 변신은 가족들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삶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자의 위치 (그레고리가 지배자처럼 행동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에서 피지배자의 위치가 된 그레고리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는 혐오로 변질됩니다. 그레고리는 가족을 위해 희생했지만, 현재에는 어떤 유익한 것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는 오로지 가족에 의해 의지 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거죠. 그레고리에 대한  가족의 시선은 혐오입니다. 마치 IMF 시절 수많은 가정이 파괴된 상황과 같습니다. 집안의 경제 여건을 온전히 책임졌다가 그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면, 그 상황에 인간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더욱 냉혹합니다. 특히 그리고리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다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러한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맺는 사건을 우리는 수 없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 사회가 각성하지 않는 이상 물질에 의한 인간성의 변화는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의 변신은 그 자체로도 놀랍습니다. 우리는 변신은 쉽게 감지하지만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무디게 느낍니다. 어느 날 문득 겨울이 왔다거나, 갑자기 날씨가 무더워졌다는 것과 같습니다. 변신이 느닺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변화도 갑자기 방문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정신적 성숙도뿐만 아니라 신체적 변화도 나타납니다. 경제나 사회적 변화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변 인물이나 가족의 변화를 쉽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같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족은 더더욱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훌쩍 커 보인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아이의 사춘기를 발견했다거나. 혹은 아내의 갱년기를 갑자기 눈치채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보받은 뒤에 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토로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시그널을 쉽게 흘려버립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이의 부재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소설에서 그레고리가 짧게나마 이야기한 부분도 소통의 부재였습니다. 집안 형편과 관련되어 혹은 자신의 이야기와 관련되어 그레고리와 가족은 소통의 부재 속에 살았습니다. 만일 가족과 자신이 서로 터 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면, 그레고리는 자신을 삶의 그렇게 몰아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소통과 관심의 부재는 가족 구성원의 변화를 알아챌 수 없도록 만듭니다. 살갑게 살던 가족이 나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살가운 척했던 겄에 불과할 정도로 얄팍한 관계였을지도 모릅니다. 아이의 사춘기가 못 마땅하다면, 혹은 아내의 갱년기가 불편하다면, 아니면 갑자기 늙어버린 부모님이 부담된다면 살갑던 가족 관계는 그냥 살가운 척하면서 살았던 관계였던 것이죠.

 

우리는 삶의 구석으로 내 몰린 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비단 가족 구성원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회사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어떤가를 고민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주어진 기회가 많거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반경이 넓은 사람들에 비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더 어려운 일로 내몰리거나 더 힘든 일을 하기 위해 선택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관심 있게 살펴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주류와 비주류의 관계입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주류와 비주류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보다 명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가 변신하기 전에 가족에서의 주류는 주인공 그레고리였습니다.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생산과 분배를 모두 독점하고 있기에 그레고리는 소수지만 엄연한 주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구성원의 숫자는 많지만 가족 구성원은 비주류에 속했습니다. 어린 탓에 아무것도 못하는 동생. 병약한 어머니 그리고 실직 상태인 아버지. 숫자로 보면 다수이지만 엄연한 비주류였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주류가 사라집니다. 마치 왕정 시대에 왕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중세 근본주의 시대에 신이 사라진 것과 같은 거죠.주류가 사라진다고 해서 모두가 평등한 아름다운 세상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변신한 그레고리가 적응해야 할 새로운 세상은 당연하게도 혼란 그 자체였죠. 마치 격변하는 시대와도 같습니다. 100여 년에 걸친 시민 혁명기에 나타난 혼란한 사회상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아니 모든 국가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극심한 혼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주류와 비주류가 나타납니다. 주류 세력이 비주류가 돼어 암흑과 같은 시기를 지내야 하듯이 비주류끼리의 세력 다툼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극단적인 움직임도 나타나기도 하죠. 또는 시류에 흐름에 그냥 몸을 맡기는 존재도 있습니다.

 

그레고리의 동생은 그레고리가 믿음과는 다르게 자신이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탄탄한 권력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그레고리를 철저히 탄압합니다. 이런 행동은 기존 주류가 갖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그레고리는 이미 비주류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탄압을 해 봤자 아무런 힘도 못쓰는 존재가 되 버렸지만 동생은 철저히 그를 탄압합니다. 동생은 그레고리가 가진 상징성을 원했습니다. 모두에게 각인된 그레고리의 상징성을 깨트려서 자신을 더욱 우월적 존재로 보이게 하고 싶은 욕망이 동생에게 존재하는 것이죠. 그래서 배신한 동료가 새로운 사회의 주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가장 악랄한 행위가 바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했던 동료를 철저히 탄압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호해 주었던 주류(주인공)의 탄압은 그래서 가능합니다. 

 

어머니는 동생과 반대로 시류에 그냥 몸을 맡기는 존재입니다. 본인에게 그럴 만한 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방식으로 권력을 쟁취하려 합니다. 그것은 그레고리와 비슷한 방법으로 계급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을 과시합니다. 새 직장을 얻은 후에 유니폼 차림으로 거실에서 꼼짝 하지 않는 버릇은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고 싶은 행동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죠. 

 

이 소설에서 특히 동생과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 카프카가 이야기하는 사회 질서의 재편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묘하게도 이런 상황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닮아있습니다. 부잣집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비주류 간의 다툼은 어찌 보면 그 속에서 주류적 위치를 형성하고 싶어 하는 다툼입니다. 기생충과 변신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팽팽한 긴장은 피로써 끝을 맺습니다. 죽음이죠. 결국 이 것은 과거 인간 사회가 거쳐온 수많은 역사와 동일한 풀룻을 갖습니다. 사회적, 정치적인 주류의 교체는 평화적인 예가 없었죠. 반드시 피와 죽음을 동반한 상태에서 질서는 재편되었습니다. 피로 반복되었던 역사를 투표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시킨 것도 결국 피와 죽음으로 대변되는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인간사는 아이러니의 연속입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리의 죽음 이후 새로운 각성을 이야기합니다.그레고리가 죽자 가족은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동물이 먹이를 주는 주인이 죽으면 같이 굶어 죽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가족은 주인공이 죽자 집을 팔고 오랜만에 외출을 합니다. 평화의 도래인 거죠.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치열한 상황이 끝났습니다. 가족 구성원은 저마다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평화로운 시대를 맞습니다. 

 

그레고리가 죽었을 때 가족들은 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레고리의 죽음이 바로 자신들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가 가정을 책임지고 있었을 때에 그들은 스스로 사육당하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살아있어도 산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셈이죠. 개, 돼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의 죽음으로 가족은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습니다.새로운 생명의 탄생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도 일치합니다. 이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지고 인간을 대신해 죽음을 선택한 예수. 그리고 그의 죽음은 인간의 구원과 각성으로 나타납니다. 즉. 예수가 죽어야 인간이 구원받았듯이 그레고리의 죽음은 가족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레고리가 죽었을 때 가족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거죠. 이 모습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가 전하는 메시지와도 일치합니다.

 

불교에서는 생(生:탄생)과 사(死: 죽음-멸과 같다)를 따로 보지 않습니다. 항상 생과 사가 공존하는 것으로 봅니다. 즉, 씨앗이 죽어야(멸:滅)새싹이 자라는(생:生) 이치와 같습니다. 이런 생과 사가 이어지는 순환을 윤회라고 하죠. 우리가 익히 들어 본 말로 <내가 죽어야 네가 산다>라고 하듯이 그레고리의 죽음(死)은 곧 가족 개개인의 탄생(生)을 의미하는 것이니 죽음과 탄생은 따로 있지 않다는 불교의 사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레고리의 죽음이 가족 구성원의 탄생. 즉 각성을 의미하는 것은 정. 반. 합으로 인간 사회 발전을 말한 변증법과도 같습니다. 주류가 항상 주류일 수는 없듯이 비주류도 항상 비주류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비주류였듯이 사회 질서를 바꾸고,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중심은 항상 그 시대의 비주류였습니다.

 

이 외에도 그레고리가 죽었을 당시 하녀로 일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어버린 저것(그레고리)을 자신이 깨끗하게 치울 수 있다>는 할머니 역시 주류 사회의 언저리에서 그 조직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비주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할머니를 강하게 제제하는 가족의 태도는 마치 “감히 네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선을 넘지 말라는 강한 경고죠. 소수를 철저히 차별하고 자신이 만든 기득권을 지키려는 전형적인 계급주의적 행위입니다. 이 부분도 영화 기생충에서 다루었던 부분입니다. 조여정을 깨우는 가정부의 행동은 선을 넘게 되고 결국 그것은 장남 기우로 하여금 가정부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하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결국 하류층이든 상류층이든 적절한 선이라는 것은 사회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 선을 강하게 그어 놓는 것은 주류뿐만 아니라 비 주류조차 그 내부적으로 계급을 만들어 자신이 만든 선을 침범할 경우 가혹한 보복을 가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그레고리의 변신으로 나타난 가족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변화와 변신은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많은 깨달음을 주는 소설입니다. 참고로 카프카의 변신과 닮아있는 이상의 날개를 같이 읽어 볼 것을 추천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