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끝에 서있는 사람들
Q: 안녕하십니까? 끝에서 있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A: 네.안녕하세요.
Q: 끝에 서있는 사람들. 음. 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 일 것 같지만 잘 와 닿지는 않네요.
A: 두리뭉실하죠? 사람들 이야기인데, 그 사람들이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을 덧붙이면 좀 쉽게 다가오나요?
Q: 훨씬 쉽네요. 그러니까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그 사람이 끝에 서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A: 네. 맞습니다.
Q: 왜 하필이면 끝이죠?
A: 끝을 통해서 전체를 들에다 보자는 춰지죠. 전체를 통해 어느 한 부분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부분을 짚어서 전체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Q: 그렇고요. 전체와 부분 중에서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하겠다는 말씀이군요.
A: 네, 맞습니다. 사람 사는 문제가 굉장히 다양하고 폭 넓기 때문에 전체를 한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분 부분으로 접근을 하다 보면 전체가 그려지는 것이죠.
Q: 그렇다면 그 전체 중에서도 끝을 보자는 말씀인 것 같은데 맞나요?
A: 정확합니다. 끝은 방향입니다.
Q: 방향이라?
A: 상하좌우. 혹은 동서남북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거죠. 예를 들어 지구의 적도에 서 있습니다. 위로 향하면
Q: 북쪽이죠.
A: 방향으로 북쪽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계속 가다 보면 어떻게 될까요?
Q: 북극에 도달하겠죠.
A: 북쪽의 끝은 북극입니다. 북극에서 앞으로 더 진행하면 남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끝은 방향을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위치를 나타내기도 하죠.
Q: 그러면 그것이 사람 사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죠?
A: 끝은 방향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신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Q: 신분이라. 이제 이해가 됩니다. 끝에 서 있다는 이야기는 신분의 한 쪽 끝에 위치한다는 말이군요.
A: 네 맞습니다. 끝이 주는 의미는 방향 외에도 신분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신분의 끝에선 사람들 이야기란 거죠.
Q: 신분제도는 오래전에 철폐되지 않았나요?
A: 시민혁명기를 거치면서 철폐되었죠.
Q: 이미 사라진 제도를 다시 꺼낸 이유가 무엇인가요?
A: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약 200여년 전에 사라진 신분 제도를 다시 꺼낸 이유는 아직 그 끝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Q: 어떤 사람들이죠?
A: 일단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영화 이야기를 할 까 합니다.
Q: 영화요?
A: 네. 몇 년전에 매우 뜨거운 이슈였던 영화였습니다. 기생충입니다.
Q: 아카데미상을 받으면서 더욱 주목받았죠.
A: 이 영화에는 네 개의 계급이 존재합니다.
Q: 네 개의 계급이라. 계급이라는 표현이 좀 자극적인 것 같은데 계층이 어떤 가요? 네 개의 계층.
A: 그런 가요? 그럼 네 개의 계층으로 하겠습니다.
Q: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떤 계층이죠?
Q: 우선 이선균이 연기한 동익으로 대표되는 상류층이 있습니다. 그리고, 송강호가 열연한 기택이네 집인 서민층이 있고, 마지막으로는 이정은이 연기한 문광역의 빈민층이 있습니다.
Q: 말씀하신 계층은 세 계층인데요?
A: 마지막으로 기택네와 문광네는 중산층이었습니다.
Q: 그렇네요. 상류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과 빈민층 이렇게 네 개의 계층으로 구분되네요.
A: 영화에서는 연기자가 대사로 이야기한 계층의 출발은 상류층과 중산층이었죠. 동익네는 상류층. 기택과 문광네 집안은 중산층이었죠. 그러다가 어찌어찌한 이유로 기택네는 서민층이 되었고 문광네는 동익의 집 지하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빈민층으로 전락했습니다.
Q: 영화를 보신분이라면 아실 만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A: 이 세계층이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죠.
Q: 한 지붕 세 가족 이네요. 옛날 팔십 년대 드라마가 생각 납니다.
A: 정확히 짚어 주셨습니다.
Q: 그런 가요? 순돌이 아빠로 잘 알려진 한 지붕 세가족이라는 드라마와 연관이 있나요?
A: 그렇죠. 과거에는 모두다 고만고만하게 사는 한 지붕 세가족이 있다면 지금은 소유한 부의 양에 따라서 계층이 나누어진 한 지붕 세 가족이 존재하는 것이죠.
Q: 그렇군요. 마치 양극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A: 맞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나라에 중산층이 주류였던 반면에 현재는 일부 상류층과 대다수의 서민과 빈민층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Q: 이제 이해가 되네요. 그렇다면 기생충과 오늘의 주제인 끝에 선 사람들과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거죠?
A: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Q: 해보시죠.
A: 상류층인 동익네 집은 위로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집 자체가 산 중턱에 위치해 있고 동익네는 대부분 계단 위로 올라가는 구도로 화면에 보여집니다. 상류층을 표현하는 것이죠. 재벌도 포함이 될 텐데 재벌이라는 설정을 해버리면 영화 스토리를 짜기 어려워서 적당한 상류층으로 설정했을 겁니다.
Q: 영화 설정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동익네는 한국 상류층을 대변하고 그래서 위 쪽으로 올라가는 구도로 배치했다는 말씀이네요.
A: 네. 맞습니다. 동익네가 위쪽 끝에 서있는 사람들이라면 반대로 문광네는 아래쪽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죠.
Q: 그렇죠. 지하실에 있으니까요.
A: 그리고, 기택네는 그 아래쪽의 언저리에 있습니다.
Q: 빈민층으로 전락하기 직전의 서민. 그러니깐 간당 간당한 위치네요.
A: 그렇죠. 기택네는 지하실은 아니지만. 반지하에 살고 있죠. 지상으로 반쯤 걸쳐진 창문 틈으로 햇살도 비쳐지는 곳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Q: 그러고 보니 비가 쏟아지는 밤에 기택네가 집으로 가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A: 네.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향하죠. 상류층이 거주하는 위쪽에서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아래쪽으로 끝없이 내려가야만 합니다.
Q: 듣고 보니 서글퍼 지네요.
A: 현실이죠. 기택네를 보면 공짜 와이파이를 연결하기 위해 집에서 그나마 위쪽인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서 공짜 와이파이를 이용합니다.
Q: 맞아요. 유명한 장면이죠.
Q: 혜택이죠. 어떤 혜택을 누리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부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 특정 계층에 편중되어 있거나, 계층별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꼬집고 있는 거죠.
Q: 그건 정부 정책의 문제 아닌가요?
A: 이따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정부 정책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거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간혹 서민을 위한 복지 정책이라지만 부유층이 더 많은 혜택을 볼 때도 있죠. 세금 할인 정책이 대표적입니다.
Q: 그렇네요. 유류세 인하도 알고 보면 기름을 많이 소비하는 계층이 더 많은 혜택을 보도록 되어있죠.
A: 맞습니다. 기택네는 중산층에서 서민으로 떨어진 사례인데 다시 중산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몸부림을 치죠. 물론 그 방법이 불법적이라는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Q: 법 테두리 안에서 신분 상승이 가능할까요?
A: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죠. 이 문제도 뒤에서 한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Q: 네. 그렇다면 기택네와 문광네는 어떤 차이가 있죠?
A: 문광네도 중산층이었다가 빈민층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입니다. 물론 기생하는 상태였죠.
Q: 제목이 기생충이라는 것을 보면 문광네가 주는 메시지도 무척 중요할 것 같은데요
A: 문광네가 처한 제도적 상태가 메세지의 핵심이죠. 누구나 이런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러한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만 문광네와 기택네의 차이는 오로지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Q: 봉준호 감독이 말씀하신 1인치가 생각 납니다.
A: 그렇죠. 아주 얇은 차이. 그 차이가 심각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Q: 듣고 보니 섬뜩 합니다.
A: 이 또한 현실이죠. 불편한 현실.
Q: 불편한 현실이라. 계속해 주시죠.
A: 문광네는 상류층에 기생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자유의사에 따른 선택이죠.
Q: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는 말씀이죠?
A: 문광네와 기택네가 비끗해서 중산층에서 서민이나 빈민 층으로 전락한 것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인생의 실패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말이죠. 어찌 보면 완전 경쟁 사회가 갖는 여러 부조리 중 하나입니다.
Q: 사회 부조리요?
A: 네. 기다려 주지 않는 거죠. 부족한 이웃이나 뒤쳐지는 동료를 버리고 가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모두 줄 세우기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가혹한 환경에 내몰린 거죠.
Q: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한 거 아닌가요?
A: 그렇게 받아들여 지도록 교육받은 거죠. 경쟁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당연한 상태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은 것입니다. 제도적 장치의 부재는 상류층 이하의 계층에게 더욱 가혹한 수업료를 요구합니다. 부의 편중으로 나타나는 하류층 사람은 고등 교육을 받는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속에서 점점 비주류로 전락 당합니다. 하층민을 영원히 하층민으로 남게 만들죠. 더 우려할 만한 현실은 경제가 확대되고 기술이 발전할 수록 사회는 더 많은 재화를 요구합니다. 과거와 비슷한 계층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과거 보다 더 많은 자산을 투입해야만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과거와 같은 수입으로는 과거보다 더 못사는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Q: 임금도 오르지 않나요?
A: 물가 상승률처럼 경제가 팽창하는 속도를 임금이 못 따라 가는 원인도 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실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거나 더 많은 지출이 필요한 상황이 만들어 집니다. 통신요금이 대표적이겠네요. 실 생활에 차치하는 통신요금이 과거 유선 전화요금에서 인터넷 통신요금이 더해지고 지금은 핸드폰 요금이 더 필요한 세상이 되었죠. 이런 사회적 필수 비용이 늘어가는 것을 저소득자의 소득에 제대로 반영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죠. 우리는 이런 문제에는 그렇다면 본인들이 그런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더 열심히 해서 소득을 향상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Q: 저도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은데요? 안되면 안 하면 되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본인들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A: 바로 그런 생각이 완전 경쟁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생각입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생활에 필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에 큰 지장을 받는 것이죠. 물론 어떤 항목들은 없어도 생존에 지장을 받지는 않습니다. 핸드폰 없다고 굶어 죽지는 않겠죠. 하지만, 생존에 국한시키는 것은 전제 군주정에나 어울리는 생각입니다. 현대 사회는 그런 생존에 더해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를 추가로 요구합니다. 그런 것이 추가되면 당연히 없어지거나 기능이 약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사회에서는 사회적 흐름에 맞는 생활에 필수적인 여러 물건이나 서비스가 있는데 이런 것을 소유하거나 이용하는데 과거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득 수준이 지출을 따라가지 못하고 특정 계층 이하의 사람은 점점 생활 형편이 떨어지게 됩니다.
Q: 그렇군요.
A: 어찌 보면 문광네의 선택이 우리에게는 더 소름끼친 방법 일 수도 있습니다.
Q: 그건 무슨 의미죠?
A: 기생하는 입장에서는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주인님이 너무 고맙죠. 그래서 그 고마움을 온몸으로 표현합니다.
Q: 머리로 계단 등 스위치를 켜고 끄는 행동을 말씀하시는 거네요.
A: 네 맞습니다. 맹목적 행위 죠. 마치 세뇌된 듯한.
Q: 이 부분은 저도 깜짝 놀란 설정이었다고 생각해요.
A: 상상을 통해서 더 무서운 설정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Q: 어떤 설정인가요?
A: 저와 Q님이 연기를 하나 하도록 해보죠. 저는 동익네의 남자인 이선균 역할을 하고 Q님은 여자인 조여정 역할입니다. 대본을 드릴께요.
Q: 네. 제가 조여정씨가 맡은 역할이네요.
A: 그럼 시작해 볼까요?
Q: 여보. 어떻 할 꺼예요?
A: 뭘? 어떻게 해?
Q: 있잖아. 밑에 지하실에.
A: 지하실? 아. 지하실 남자? 왜? 뭔 일 있었어?
Q: 아니 뭔 일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좀 찜찜해서 그렇지.
A: 내버려둬. 저렇게 먹고 살겠다잖아. 그렇다고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렇게 살다 죽게 내버려둬. 여기까지입니다.
Q: 재미 있네요. 이 대본이 말하는 건 뭔가요?
A: 사육입니다.
Q: 사육이요?
A: 네. 기생을 하러 동욱네 지하실로 들어갔던 문광네의 남편은 스스로 자유 선택에 따라 지하실에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만일 동욱네가 지하실에 있는 문광네 남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 순간부터는 문광네 남편은 동욱이네 집에 그건 기생하는 형편이 아니라 동욱네에 의해서 사육이 되는 거죠.
Q: 기생에서 사육으로 지위가 바뀐다는 말씀이신데 듣기에는 상당히 불편한데요?
A: 그렇죠. 동욱네가 인지하는 순간 문광네 남편의 생사 여탈권은 남편 본인에게서 동욱네로 바뀌게됩니다.
Q: 그러니까 문광네가 기생하는 것 까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기생을 그만두는 것도 스스로선택할 수 있지만, 동욱네에 의해서 사육되는 순간 문광네 남편의 생사는 오로지 동욱네에 손에 달려있다는 말씀이시네요.
A: 그렇습니다. 안락한 삶을 선택한 대가인 셈이죠. 물론 기생이 습관화되면 스스로 선택권을 내던지는 것과 같지만 그 이전까지는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가 있는 거죠. 물론 그 선택이라는 것이 특별할 것이 없는 매우 보잘것 없다 할 지라도 스스로 선택권이 주어진 상황과 그것마저 박탈당한 상황은 엄연히 다르죠.
Q: 그렇네요. 소름이 돋습니다.
A: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는 대신 모든 자주적인 의사결정권을 박탈당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있죠.
Q: 예를 들면?
A: 맹목적 추종자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부조리한 상황이나 불합리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꼬집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에 속하죠.
Q: 그렇네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사실은 사육 당하는 처지다?
A: 돼지 우리에서 태어난 돼지는 우리 바깥 세상을 모른 체 살아 갑니다.
Q: 그렇죠.
A: 그렇다면 어느 날 돼지우리에서 사육 당하는 돼지를 불쌍히 여긴 한 사람이 문을 열어 돼지를 해방시켜 줬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Q: 글쎄요?
A: 아마 이게 뭐지? 하는 약간의 혼란이 있겠지만 돼지는 쉽사리 우리 밖으로 발을 내딛지 못합니다.
Q: 왜 그렇죠?
A: 두려움이죠.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 바깥 세상이 어떨지 모르기에 자신에게 닥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추가로 혼자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겠죠. 물론 실제로 바깥에 나가는 자유를 얻는 대신 가혹한 환경에 내몰릴 수도 있습니다.
Q: 그래서 돼지는 우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A: 비극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Q: 이 말씀도 상당히 불편한데요?
A: 불편해도 현실을 바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영원히 그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Q: 그래서요?
A: 중요한 것은 부리조한 현실을 알고 바꾸거나, 닥쳐올 변화에 대한 준비를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거나, 뭐. 이런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Q: 너무 막연 한데요?
A: 그렇죠. 이런 생각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 막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Q: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같은 혁명을 하자는 이야기 인가요?
A: 혁명이요? 아닙니다. 요즘세상에 혁명이라뇨. 혁명으로 상황이 바뀔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어요. 그리고 안락함에 너무 심취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혁명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죠.
Q: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A: 인식입니다. 만일 제도를 통해서 고쳐 지거나 해소가 된다면 아주 간단 합니다. 그냥 사회적인 제도를 만들어서 시행하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겠죠.
Q: 복지 혜택이나 사회 보장제도를 말씀하시는 군요.
A: 네. 어떤 규제나 허들 같은 제도도 포함되겠네요. 그런 법적 제도가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완전한 대안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돌아가거나 혹은 공평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제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하나의 제도가 시행된다면 그 제도로 인해 발생하는 이면을 보완해주는 제도가 별도로 만들어지는 형태로 수정되거나 보완될 여지는 있지만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불완전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을 통해서 타협하거나 묵인하기 때문에 사회 문제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죠.
Q: 왜? 그렇죠?
A: 국가는 재화를 분배하는 목적에 있는 게 아니라 재분배를 합니다. 만일 모든 사회적 재화를 분배하는 역할이 국가에 주어진다면 무척 편리합니다. 그냥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거나 약속된 조건에 따라 분배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로 이어지겠죠. 이런 완전 분배는 공산주의 사회나 가능한 일인데 이를 실현한 사회주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국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Q: 역사적으로 실패했다는 말씀인가요?
A: 네. 이론적으로는 매우 좋지만 현실사회에 나타난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경제 단위가 협소한 농본 사회에서나 가능한 이론이지만 경제 단위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 세상에서는 불가능 하죠. 또한 분배의 역할을 맡은 공무원의 도덕적인 문제와 개인이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따른 분배 규모를 설정하는 문제등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국가에서 생산하는 모든 재화를 국가가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재화를 분배하는 역할을 맡은 게 아니라 에 한정된 재화. 즉 세금을 이용해서 재화를 재 분배하는 소극적인 역할만 주어져 있습니다.
Q: 소극적 역할이라.
A: 사실 세금을 사용해서 사회 시스템을 정비하거나 하는 방향에서는 과거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겠지만, 국가가 모든 부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죠. 게다가 시민 사회가 이러한 부의 재분배에 민감할 수록 더 어려운 처지가 됩니다.
Q: 그렇군요. 그렇다면 끝에 서 있는 사람들 스스로 뭔가를 해야하나요?
A: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Q: 어렵다뇨?
A: 사실 아래쪽 끝에 있는 사람에게는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뭔가를 해 볼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붕괴된 사회에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셈이죠.
Q: 개인의 노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A: 노력과는 별개입니다. 고독사라고 있죠. 과거에는 노년층에서 많앗던 고독사가 최근에는 젊은층까지 고독사로 많이 죽습니다. 노량진 고시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젊은 청년의 고독사도 뉴스로 나왔었죠.
Q: 기사로 본적 있습니다.
A: 이들에게는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Q: 마이크요?
A: 네. 영화 조커가 대표적입니다. 열심히 일을해도 자신에게는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죠. 조롱과 희화화만 남습니다. 마치 더 열심히 하라는 메세지와 같은 것이죠.
Q; 그렇다면 민중 보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A: 아닙니다. 현대 사회는 그마저도 불가능합니다. 이미 개인화 된 사회에서 집단 봉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Q: 어떻게 해야만 이런 부조리가 해소될까요?
A: 관심입니다. 우리는 위쪽 끝을 바라보며 살고 있지만 사실 아래쪽 끝에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회 정책과 좋은 제도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이죠.
Q: 투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A: 올바른 투표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제도는 정치에서 출발하니깐 그것도 좋은 방법이죠.
Q: 그렇군요.
A: 지금은 누구나 꿈 꾸면서 열심히 살면 신분 상승이 가능한 시대에서 살고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험만 존재하는 것이죠. 그래서 위를 바라보기 보다는 아래에 더 많은 관심과 정책이 필요한 현실입니다.
Q: 끝에 선 사람들이라...
A: 우스운 것은 위치한 지점은 위쪽 끝인데 신분은 다른 쪽 긑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Q: 누구죠?
A: 대형 빌딩의 끝에 있는 사람과 고공 농성자의 위치입니다.
Q: 이를테면 고공 농성을 벌이는 부당 해고자와 사장님의 위치를 말씀하시는 거네요?
A: 네. 두 사람모두 상대적인 끝에 서 있지만 사회적 위치는 다른쪽 끝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죠.
Q: 그렇군요.
A: 아직 우리 사회에는 끝과 끝에서 살면서 서로 대립하거나 서로를 외면하면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Q: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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