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공동체 회복과 소통: 공자의 인본주의 사상을 토대로
1.서문
지난 메일에서 000 회장님이 지적하신 [‘우리가 모두 하나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와 [조직 간의 벽이 ‘우리’를 만들지 못하고 ‘나와 남’을 만듭니다.]라는 의미를 토대로 조직 공동체 회복을 제안 드렸습니다. 저는 일본의 회사에서 적용 된 전통적인 공동체인 ‘이에’ 사상을 차용하여 우리도 한국 특유의 조직 공동체를 회복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 동안 한국 회사가 ‘기능적인’ 측면에서 공동체를 유지 했다면 앞으로는 기능에 의미를 더해서 올바른 공동체 문화를 정착 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제안의 이유는 경쟁 해야 할 주체는 내부 구성원이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회사와 더불어 같은 운명을 공유 한다는 점에서 운명 공동체적 인식을 통해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 조직 공동체 회복의 핵심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레포트한 “할 말 하는 토론 문화”나 “사명의 중요성”도 이러한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방법에 포함 됩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조직 공동체가 활성화되어 개인의 발전과 조직의 발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보고서가 전체 맥락을 짚어보는 취지였다면 이번 보고서는 개인간 경쟁 시스템과 조직 공동체에 대해서 폭넓은 관점을 통해 공동체 회복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조직 문화 활성화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고자 합니다.
2.경쟁 시스템
기업은 경쟁을 통해 발전 합니다. 과거 기업은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형태의 활동에만 집중했습니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단순한 경제 원칙이 기업의 근본적인 활동이었습니다. 기업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자본과 대규모 공장 생산 시스템의 결합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기업의 역할은 생산물을 단순히 공급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와 정치는 물론 역사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①
①: 기업의 발전은 자본주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중세시대 소규모 장인 형태의 생산시설에서 산업혁명 이후 대규모 공장 생산시설로 발전 하면서 자본주의는 급격한 발전을 합니다. 소규모 생산-주문자 생산방식에서- 잉여생산물의 등장은 기업의 과점과 독점체제를 형성했고 이는 식민시대와 두 번의 세계대전의 단초가 됩니다. 이후 폭발적인 경제 활성화와 경제 공황은 기업 활동을 더 이상 내수 기반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세계화로 발전하게 됩니다. 결국 기업 활동은 경제 주체로써만 머물지 않고 사회와 정치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방향으로 진화 합니다. |
기업과 인간 문명(사회)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인 경쟁 시스템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 합니다. 하나가 자연적 경쟁이고 다른 하나가 사회적 경쟁입니다.
경쟁 시스템은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태초에 자연계가 태동하던 시기부터 존재 했었습니다. 자연계에서 경쟁은 [본능]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경쟁이 [생존경쟁] 입니다. 이른바 하나의 개체가 살아남기 위한 경쟁입니다. 자연계의 생존경쟁은 전체 자연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먹이사슬을 통해 자연계가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더 있다면 종을 보존하기 위한 [종 보존 경쟁]입니다. 자연계는 발전하기 위해서 각 종마다 스스로 우생학적 유전 인자를 받아 들이고 열성적 인자를 버리는 형태로 종을 보존해 왔습니다. 이러한 자연계에서의 경쟁은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도 여기에 해당 됩니다.②
②: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경쟁은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먹이사슬로 대표되는 생존경쟁의 경우에 이미 포만감을 느낀 상위 포식자는 눈 앞에 먹이가 있어도 사냥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종을 멸종 상태로 몰고 가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같은 종을 의식적으로 도태 시키지도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도태는 오랜 시간을 거쳐 자발적인 진화의 한 형태로만 나타납니다. |
그런데, 특이할 만한 사실은 인간만이 갖는 경쟁 시스템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 경쟁 입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필요에 의해서 경쟁 상태를 만들어서 이를 기반으로 [인간]이라는 종(조직)을 발전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경쟁은 잉여생산물과 계급구조가 나타나는 농경 정착 사회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수렵-채집 생활에서는 사회적 경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까닭에 사회적 경쟁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인간은 [잉여 수확물]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사냥을 하고 필요한 만큼만 채집하니 수확물을 장시간 보관한다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이 논리는 거꾸로 들여다 봐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확한 것을 보관한다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만 수렵-채집을 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당시 지구의 면적대비 인간의 숫자를 생각해 보면 필요한 만큼의 수확물을 얻는 것 자체가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또, 수렵이나 채집을 위해서는 빈번하게 이동을 해야 했으니 포획하거나 수확한 생산물은 바로 소비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사회 구조에서는 당연히 경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물과 비교되는 독특한 인간만의 시스템은 [사고-생각하는 힘]에서 시작 합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몸으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실제 행동하는 과정의 수정을 통해 진화합니다. 이는 습관화 된 행동을 고쳐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은 그 경험적 과정에서 [사고]를 합니다. 이 사고는 종의 발전을 매우 빠르게 앞당기게 됩니다. 일반적인 발전 과정이 폭발적으로 단축되는 셈 입니다.③
③: 이러한 초기 진보 덕분에 인간은 빠른 진보를 행하게 되었다. 정신이 계몽되면서 점점 기능이 계량되었다…<중략>… 사람들은 뒤이어 그 오두막을 점토나 진흙으로 다져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의 설립과 그 구별을 형성하고, 일종의 사유재산을 도입한 최초의 혁명시대 이다. 아마 그 사유재산은 이미 다툼과 싸움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인간이 만든 사회적 경쟁은 전체 인류 발전에 기여했지만 부작용 또한 매우 컸습니다. 가장 큰 부작용은 도태(멸족)에 있습니다. 인간은 건강한 같은 종을 의식적으로 도태(멸족)시키는 특이한 행동을 합니다. 이는 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자연적인 도태가 아니라 매우 건강한 같은 인간을 의도적으로 도태(멸족] 시키는 행위를 말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자연계에서는 인간만이 하는 유일한 행위입니다. 다소 부족하거나 모자라 더라도 같이 어우러져 사는 것이 아니라 도태시켜 버립니다.④ 이런 의도적 행위는 하나의 인종을 말살시키는 비 도덕적인 행위로 까지 나타납니다. 대표적 행위가 바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 자행한 인종 청소가 있습니다.⑤
④: 사회적으로 부족한 인간을 도태시키는 시스템을 학술적으로는 ‘우생학’으로 분류 합니다. 우생학은 우수한 유전자를 통해서 사회를 진보 시킬 수 있다는 학문으로 플라톤의 철학에서 출발 했습니다. 우생학에는 두 가지 분야가 있는데 최고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결합하는 [적국적 우생학]과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출산을 막기 위해 강제 낙태와 불임을 하는 [소극적 우생학]이 있습니다. 미국은 1923년 캐리벅에게 강제 불임 수술을 통해 열성 유전자를 도태 시키는 명령을 내립니다. ⑤: 1730년 당시 파라과이 인디언의 인구는 13만명이었으나 반세기도 못되어 전체 인구의 절반이 죽습니다. 예수교 교구에 따르면 유목생활에 익숙한 인디언을 포르투갈의 점령자가 강제 집단 생활을 시켜서 발생하는 집단 전염병을 그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특히 중,남미 인디언을 노예로 팔거나 인종청소를 했는데 대표적으로 아나우낙 지방의 인디언은 1500년 2500만명 수준 이었던 인구가 1605년 100만명으로 줄었으며, 1530년 1000만명이던 잉카제국 인구 역시 1600년에 100만명 수준으로 줄어 듭니다. 불과 반세기만에 중남미에 살던 대부분의 인디언이 비인간적 방법으로 멸족 당하게 됩니다.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인간이 만든 사회적 경쟁 중에서 가장 나쁜 형태로 나타나는 경쟁이 바로 [전쟁] 입니다. 의식적으로 집단이나 국가를 만들고 역시 의식적으로 같은 인간을 공격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인간이 유일 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에서 존재하는 [생존 경쟁]이나 [종 보존 경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로지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같은 종을 죽이는 경쟁을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좋지 못한 경쟁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만이 유희를 위해서 같은 종을 부리는 행동을 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경쟁 행위는 대부분 인본주의와는 서로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발전이라는 달콤함에 가려져 보여지지만 않을 뿐이지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인간이 만든 의식적 경쟁에는 생명에 대한 고귀한 존경이나 서로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루소는 인간 사회가 발전 함에 따라 오히려 인간은 퇴보 된다고 말 합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지녀야 할 능력들이 도구를 사용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상실 한다고 말 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미개시대가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인간적이었다고 말 합니다. 루소의 인본주의적 사상은 정치 사회학자 클라스트르로 이어 집니다. 그는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과 십 년 이상을 같이 살면서 연구한 논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수렵 채집 생활을 하는 미개한 종족이 사실은 현대 인류보다 훨씬 인간적이었으며 훨씬 평등한 사회 관계를 유지 했었다고 말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만든 각종 사회제도가 사실은 인간성 자체를 없애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서양 철학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같은 철학적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3.공자가 제시하는 공동체 회복
공자는 춘추시대 노나라 학자입니다. 춘추시대는 전국시대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이 벌어졌었던 매우 혼란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혹한 경쟁 체제인 전쟁이 중국 대륙 전체에서 벌어졌습니다. 공자는 이런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가정이 파괴되는 상황에 개탄 합니다. 국가간 경쟁뿐만 아니라 개인간 경쟁도 치열했던 시기에 공자는 이런 사회가 지속 될수록 공동체는 무너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고 생각 했습니다. 특히, 부,모가 음양의 조화를 통해 아이를 길러야 하는데 아버지는 전쟁에 끌려가고 결국 가정이 파괴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이 바로 서야 할 자리가 없다고 생각 합니다. 공자는 전체 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바로 세워 나를 다스림(수신-修身)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음양의 조화에 따른 부(양), 모(음)를 중심으로 가족 공동체를 회복(제가-齊) 해야 한다고 역설 합니다. 결국 나를 다스려 가족의 공동체가 회복되면 지역 사회 공동체와 함께 국가 전체가 발전(치국-治國)을 하게 되며 결국에는 전체 인류 사회가 평화로워 진다(평천하-平天下)는 결론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신은 제가로 이어지고 이는 치국의 근본이 되며 결국에는 평천하로 이어지는 과정 입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
과도한 경쟁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성의 실종은 규율과 규범을 무너트리고 자연계 질서를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기능적인 역할에만 치중하게 되고 결국 조직 전체를 유지하기 위한 가치관의 실종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가치관의 실종은 개인주의의 확산을 불러 옵니다.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거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집니다. 결국 조직에 위기가 찾아오면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게 되고 위기를 다 함께 돌파해야 할 힘이 부족해 집니다.
4. 인(仁)이란 무엇인가?
공자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인류 전체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 방법으로 인[仁]을 실천 하라는 제안을 합니다. 바로 인본주의[人本主義] 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의 실천은 ‘어질 인’ 입니다. [어질다]는 것은 생각하는 바(마음)와 행동하는 바(몸)가 모두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 또한 높음을 이야기 합니다. 흔히 [착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착하다]는 말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과 돌아보고 스스로 [착함]을 평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착하다]와 같이 스스로에 대한 자기 평가가 가능하지만 [어질다]는 것은 스스로 [어짊]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어짊]은 내가 타인을 향해 [어질다.] 고 하거나 타인이 나를 향해 [어질다.]는 평가만 내릴 수 있습니다. [어질다]는 것은 나의 마음과 행동이 타인을 통해 동의 될 때 비로소 나의 [어짊-어질 인(仁)]이 실천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사에서도 어진 군주가 나라를 다스렸던 시대를 태평성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진 정치가 백성과 나라에 주는 이로움을 역사가 기록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진 군주가 펼친 [어짊]에 대한 기능적인 면을 현시대에 [리더십]이란 이름으로 소환하고 있습니다.
어진 군주. 어진 아버지. 어진 어머니. 위에 이야기한 [어짊]에는 덕행(德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덕(德)은 일체성을 가진 도덕과 윤리의 기초가 됩니다.
보통 행동의 선택에 있어서, 행동의 목적을 생각하고 그것이 윤리적 의무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하는 목적 그 자체가 도덕적 의무를 바르게 수행하자는 동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덕(德) 입니다. 즉 덕은 정신적 품성을 말 합니다. 이것은 칸트가 말하는 [자기 완성]과 [타자의 행복]으로 완성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을 동물적인 상태로부터 인간성을 갖는 인간의 상태로 올려 놓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김우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행(行)은 덕을 기반으로 나타납니다. 잠재 된 의식이 이성적 기능으로 나타나는 것이 행(行)입니다. 만일 개인이 본성에 존재하는 덕의 형태를 감추고 행(行)동 하는 것이 가능할 까요? 만일 잠재된 의식이 나쁜 말을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행동으로 옮겨져 입으로 나오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흔히 찰나의 시간에 욕설이 입으로 나옵니다. 행위자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사실은 잠재된 본성이 짧은 시간에 이성을 건드려 의식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결과 입니다. 이는 칸트가 말 하는 [자기완성]의 결과 입니다. 칸트는 [자기완성]과 [타자의 행복]을 인간이 지녀야 할 마땅한 의무로 표현했습니다. [자기완성]은 자신의 여러 능력을 기르고 의지를 단련하는 것을 말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 단련을 통해서 무지를 극복하고 타자의 행복에 대한 요구를 충족 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자기완성의 준비된 자세로부터 인간은 동물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회복 한다고 말 합니다.⑥
⑥: 타자라는 말은 타인이 아닌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생명체를 뜻 합니다. 칸트는 인간이 감정에서 나타난 이성적 행동이 타자의 불행을 야기 한다면 그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 끝임 없이 자신을 갈고 닦으면 감정이 이성으로 나타나는 그 짧은 시간도 이성에 의한 조절이 가능 하다고 합니다. [논어-학이]에 나오는 [하루 세 번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기 수양은 본능에 기반한 행동을 원칙적으로 차단하고 윤리와 도덕에 기초한 행동을 통해 인간 됨의 근본을 지킵니다. |
결국 덕행이 인간에 대한 근본을 이야기 하니 [어질-인(仁)]은 인간다움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사리사욕을 배제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 자체에 충실 할 때 서로 [어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백성]을 인간으로 대하고, [부모]는 아이를 [인간]으로 대하고 [선배]는 후배를 [인간]으로 대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가 본인만 아는 이기주의자 인데 [저 사람 참 어질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행동이 너그러운 사람을 향해 [어진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결국 상대를 대 할 때 근본적인 인간다움으로 상대를 대 하라는 이야기 입니다. [인간다움]은 곧 [인간답다] 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어머니는 [어머니 다울] 때 가정이 바로 서듯이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 다울] 때 나라가 바로 선다는 이치 입니다. [君君臣臣父父子子-군군신신부부자자: 논어]
이러한 [~다움]은 서양 사상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플라톤은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인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 했습니다. [아름답다.]가 가진 근본적인 본질은 [아름다운 것.] [사람답다.]의 본질은 [사람인 것]으로 말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고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단지 현재의 아름다운 것들이 이데아에 존재해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닮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우리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름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결국 인간다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근본적인 [인간다운 인간]이 존재 한다면 나머지 사람은 [인간다운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일상에서 끊임없이 인간다운 행동을 실천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양과 동양 사상이 다르지 않으니 [인간]이라는 것을 탐구하고 이야기 하는 것에 다다르는 길의 끝은 결국 인간 본연의 모습 입니다.
5.인(仁)의 실천
인[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선조 성리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인[仁]에 대해서 이렇게 말 합니다. 仁者, 二人也. 二人相與者也 [인자,이인야. 이인상여자야.] 이를 풀면 [인(仁)이란 두 사람을 말 하며,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하는 것이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仁]이라는 글자를 세로로 나누어 보면 사람인[亻]변에 둘 이[二]가 합쳐진 글자로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태 입니다. 이는 곧 두 사람이 함께 한다는 말로 서로 소통하는 것이 바로 인[仁]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말하는 [어질다]를 실천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정약용 선생은 [소통]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누군가와 소통 한다는 것이 [어질다]의 실천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타인과 빈번한 접촉을 통해 생활 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생활만으로 [어질다- 인(仁)]를 실천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통을 통한 [어질다]의 실천이 뜻하는 바를 좀 더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 했습니다. 또한, [어질다]는 타인을 통해 확인이 가능 하다고 했습니다. 공자가 말한 [수신-제가-치국]또한 [나]뿐만 아니라 [타인]이 함께 포함 됩니다. 결국 [개인-나]라는 단일적 존재는 완전한 인간으로써 존재 할 수 없음을 말 합니다. [나]라는 개체는 자연계에서 하나의 생명체로써의 [인간]으로만 존재 할 따름입니다.⑦
⑦: 인간이 단독적 자아로써만 자연계에 존재 했다면 지금과 같은 진화와 발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타인과 교류를통해서 문명을 발전 시켰다는 것은 언어와 문자의 발명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합니다. 초기 인류는 단순히 몸 동작(춤)만으로도 소통이 가능했으나 몸짓 이상의 소통을 위해서는 성대를 이용한 언어라는 특별한 체계를 완성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동물과 같이 생에 대부분을 오로지 생존을 위한 활동을 하는 생활 형태에서 벗어 났음을 말 합니다.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설] |
다시 말해서 동물로써 인간이라는 개체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상호 교류가 필수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라는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 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아버지]로 불려야 합니다. 내가 남편이라는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아내에게 [남편]으로 불려야 합니다. 나는 후배 에게는 선배라는 하나의 존재로. 선배 에게는 후배라는 하나의 존재로 존재합니다. 이는 모두 사람간의 소통을 통해서 비로써 ‘나’라는 존재가 완성 된다는 말을 뜻합니다. 즉. 단독 자아로써 인간은 그 어떤 의미가 되지 못하고 반드시 서로가 교류를 할 때 인간의 근본인 [자아]가 바로 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팀장님]으로 부를 때 비로서 [팀장]이 존재하며 누군가가 [기장님]이라고 부를 때 비로서 [기장]이라는 하나의 인격체가 존재하게 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인 [꽃]이라는 시 입니다. 상호 관계를 통해 비로소 인간[꽃]의 본질을 찾는다는 내용으로 공자나 플라톤이 말하는 [~다움]을 잘 표현한 시 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수입니다. 소통이 단절 된다는 것은 죽어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소통이 단절된 가족은 더 이상 가족으로써의 기능을 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회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소통이 단절된 회사는 기계적 기능만 수행하는 기계덩어리에 불과 합니다. 그 속에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기계부품과도 같은 셈 입니다. 인간미가 사라진 곳에 어느 누가 머물고 싶어 할 까요? 마치 죽어버린 공간에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마지못해 출근하는 기계부품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은 언젠가는 허물어질 모래성과도 같습니다. 공자는 [어진 마을의 인심은 아름다운 것이니 스스로 인후한 마을을 택하여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겠는가-子曰. 里仁 爲渼擇不處仁焉得知: 논어]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인을 실천하면 가족이 인(仁)으로 가득하고 그리고 마을 전체의 인심이 어질게 되니 이런 마을에서는 평생을 살아도 좋다고 했습니다. 결국 개인이 인(仁)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조직 전체가 살아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올바른 인(仁)의 실천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는 인간의 근본에 대한 이야기와 같습니다. [인간다움]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지식인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공자는 인을 실천 하는 것에는 사람(제자)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실천 방법을 이야기 하지만 큰 의미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는 우선 근본이 바로 서야 한다고 말 합니다. [군자는 반드시 근본에 힘쓰고 근본이 확립되면 인의도가 생기니 효와 제라는 인을 실천하는 데 근본인 것이다:논어]
그 근본으로는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오면 윗사람을 공경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며, 널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 논어]고 했습니다. 또한 [사람은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하거나 [허물은 서슴지 말고 바로 고치거나]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며 [사람을 사랑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을 이겨야 한다-극기]라고 했습니다.
동양 철학의 최고 반열에 오른 맹자 역시 공자의 인본주의를 이어받아 자신의 왕도정치를 구현 하는데 활용 했습니다. 맹자는 [어진 마음을 널리 펴면 천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맹자]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진 정치를 베푼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그 왕에게로 올 것이다: 맹자]라고 했으니 결국 어진 정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곧 왕도 정치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회사 조직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기업이라는 것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계약된 사람이 모여 일을 하는 집단 입니다. 기업의 본질이 이렇다 하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갖는 의미는 초기 자본주의에서의 기업의 의미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초기 자본주의에서의 기업은 오로지 생산물의 수요를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익집단 이었다면 현대에서는 경제적 역할 이외에도 사회적 역할과 도덕적 역할까지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역시 기업의 본질이 과거와는 다르며 이 사회적 책임에는 이해 관계자 외에도 지역주민이나 더 나아가서는 이해 관계에 직접 얽매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책임까지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현대 기업 활동은 제품의 품질을 높이거나 가격을 싸게 책정 하는 것 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얻는 행위. 즉 루소가 말한 타자의 행복이 추가로 요구 된다고 하겠습니다.⑧
⑧: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1953년 보웬(Bowen)의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Social of the Businessman]에서는 "CSR이란 기업가에게 주어진 사회 전체의 목적이나 가치에 알맞게 자신들의 정책을 추구하고 의사결정을 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에 옮기는 의무"라고 정의 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본격 논의가 됩니다. 이후 2005년 브라질에서는 ISO의 주관으로 1차 SR총회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국제 표준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 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표준화 작업은 2010년 10월 코펜하겐 회의에서 일곱 가지 핵심 과제를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명시하고 CSR에 대한 표준을 [ISO 26000]으로 지정합니다. |
[인간다움]이 인의 실천이니 이는 곧 사람의 근본을 잘 세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좀 더 살펴보면 맹자는 인간의 근본에는 본성에서 우러러 나오는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이며 이를 [측은지심]이라 합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로써 [수오지심]이라 합니다. 타인을 공경하는 마음은 예(藝)로써 [공경지심]입니다. 마지막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은 [시비지심]으로 지(智)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갖추는 것이 곶 사람의 본성을 갖추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 보다 어려운 생명체, 나 보다 아래에 있는 생명체, 나 보다 힘든 생명체 등 타인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니 항상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길러야 합니다.
맨더빌은 그의 저서 꿀벌이야기(1723)에 죄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은 바로 [연민의 정]이라고 하였습니다.⑨
⑨: 죄수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 밖에는 괴물이 있고 맞은 편에는 두려움에 떠는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괴물은 아이를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는 잔인한 짓을 저지릅니다. 여인은 두려움과 공포에 비명을 지릅니다. 죄수는 감옥 안에서 이 광경을 모두 목격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합니다. 저자는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이라 할 지라도 그 내면 깊은 곳에는 타인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연민의 정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도 같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이 동물과 달라 지려면 성찰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심상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
펠레로우스도 알렉산드로스에서
가장 부드러운 마음이야말로 /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 자연이 인류에게 보낸 눈물이 그 증거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실제로 관대, 인자, 인간애라는 것은 약자, 죄인 또는 인류 일반에게 적용된 연민의 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친절과 우정 역시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특정한 대상에게 쏟은 불변의 연민의 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괴로워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원하는 것과 같지 않는가.[루소:인간 불평등 기원론]
라는 말처럼 측은지심이나 연민의 정. 관대함. 인자함. 이란 것 모두가 내가 아닌 타인을 먼저 살피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내가 행복해 지니 이는 곧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말 입니다. 이것을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타인에 더해서 모든 생명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니 결국 칸트가 이야기한 [타자의 행복]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를 근본 사상으로 합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인데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예수는 이슬람 율법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랑으로 만물을 포용하라고 했으니 곧 모든 만물을 불쌍히 생각 하라고 합니다.
자비라는 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 대지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것이요. 주는 사람과받는 사람을 다 같이 축복하는 것이니 미덕 중에서도 최고의 미덕이며, 왕관보다 더 왕답게 해주는 것이오. 그대가 호소하는 바는 정의이지만, 정의만 내세우면 구원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 하시오. [세익스피어-베니스의 상인]
6.회사에서 인(仁)의 실천
회사에서 조작에 속한 사람은 모두 특수한 관계에 묶여 있습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회사 동료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인데 이 관계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혈연으로 매여있는 가족과 달리 회사는 계약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각 개별적인 존재로써 회사와 계약을 한 당사자 입니다. 결국 개개인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회사와 계약을 한 당사자입니다. 그러므로 회사에서의 인간 관계는 결국 온전히 개인적인 이익에 따라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관계는 무너지기 쉽습니다. 회사에서는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소통이 개개인의 상태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이는 회사의 필요에 의해 강제로 묶여진 하나의 조직단위에 속한 개인이 회사로부터 지시 받은 생산활동에 기능적으로만 참여 한다면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소통은 지극히 기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조직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도 효과가 미진 하다면 근본적인 관계 설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먼저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이런 노력 없이 단지 기능적인 시스템만 만든다면 오히려 근본적인 의도가 왜곡 되거나 하부 구조로 전달 될수록 변형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업무가 지시되어 내려 온다면 그것을 반드시 수행해야 함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그 업무에 따른 긍정적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것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모든 구성원이 잘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리는 개인이 지시를 따르는 하급자의 어려움을 잘 살펴 이해를 구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또한 지시를 받는 개인은 지시를 하는 상급자의 고충을 이해한다면 업무의 이행 상태나 결과가 보다 좋아 질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시스템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간의 태도에 따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입니다.
[할 말 하는 토론 문화] [조직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일] [사명 하나 만으로도 모든 조직이 잘 돌아가는 기업] 이런 모든 명제가 다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물론 제가 말씀 드리는 [조직공동체]역시 같습니다. 단지 무엇부터 풀어 나가야 할까? 에서 막혀 버립니다. 이는 내포된 깊은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기능적인 부분에만 시선을 맞추면 답을 찾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래서 의미를 먼저 통찰 하는 노력이 선행될 때 어떻게? 라는 질문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00년에 접어 들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바로 [리더십]과 [성공학]입니다. 웃기는 건 [리더십]과 [성공학]이 가장 많이 팔리고 관련 세미나도 엄청 많은데 우리는 올바른 리더를 찾았다는 말이나 책보고 성공했다라는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왜 일까요? [이순신] [세종대왕] 하물며 [히딩크]에 [김성근 감독]까지 리더십관련 책이 쏟아 졌습니다. 성공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이해 없이 단지 [기능적인] 부분만 들여다 보니 이상적인 결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순신]은 리더십이 있는데 [원균]은 리더십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결과에만 시선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 길들여 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리더십이 가장 활발히 활용되는 분야가 경제분야 입니다. 조선시대 최고 장군의 반열에 올라선 사람이 리더십 없이 그냥 장군이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원균]도 매우 훌륭한 장군 입니다. 단지 선조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무리한 출정을 감행해 [칠전량]에서 대패했고 [이순신]은 이와 반대로 선조의 명을 거역한 대신 크게 성공 했기에 역사적인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할말 하는 토론문화]나 [조직간의 벽을 허무는 일]은 모두 인본주의에서 출발 합니다. 이 인본주의는 결국 공자나 모든 지식인이 말 한 근본-인(仁)의 실천 입니다. 사람다움을 실천 해야 합니다. 회사는 실체 하지 않는 존재 입니다. [회사를 내 앞에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움직이는 존재는 바로 사람 입니다. 결국 회사가 발전 하려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중심에 서야 합니다. [인간 중심의 경영]도 이와 일맥 상통합니다 인의 실천은 바로 소통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움] 이라고 했습니다. 직책자는 [직책자 다움]을 [선배는 선배 다움] 생산파트는 [생산파트 다움] 관리파트는 [관리파트 다움] 이는 곧 근본에 충실 해야 함을 말 합니다. (초심과도 비슷합니다.) 팀장님다움은 [팀장으로써 해야 할 근본적인 역활]에 집중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총장님다움, 기술장님다움도 마찬가지 입니다. 선배, 중간, 후배도 모두 근본적인 다움이 실천 될 때 조직은 원활히 돌아갑니다. 이를 흔히 하는 말로 [조직의 질서가 바로 서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질서는 조직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두루 펼쳐있습니다.
단지 이를 상명하복식 계급문화와 연관시켜서는 곤란 합니다. 앞에서 가장 비 인간적인 경쟁은 바로 전쟁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결국 전쟁은 군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군대는 곧 상명하복식 계급문화의 꽃 입니다. 계급은 소통을 가로 막는 가장 큰 벽이 됩니다. 예전 리포터에서 [이황]선생과 [기대승]이라는 젊은 학자의 8년간의 토론을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만일 [이황] 선생이 계급문화에 젖어 있었다면 토론 자체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급이 다르기 때문이죠. 이황 선생이 [네 까짓 게 감히 나한테 대들어?]라는 계급의식에 젖어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토론이죠. 논어에는 敏而好學不恥下問 민이호학불치하문<<논어>>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뜻이니 곧 나를 성장 시키는 것에는 상하구분이 없으니 결국 소통이 중요 하다는 결론입니다. 이런 소통을 위해서 몇몇 기업은 [호칭의 파괴]를 하기도 합니다. [호칭]은 곧 [계급]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조직 내 최고 상급자는 토론에서 [결론]에 집착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본인이 결정을 하는 결정권자이거나 책임자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려 하거나 결론을 들으려 합니다. 소통이 안됩니다. 지난번에 [조직의 사명]을 이야기 할 때 드린 말씀 입니다. [권한의 위임]과도 같은 효과를 보려면 경청이 중요합니다. 직책자나 상급자가 [의견 주세요] 하면 조용 합니다. 왠지 나서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그리고 최고 직책자나 책임자가 한마디 하면 그게 곧 결론이 되어버리는 회의문화. 아마 일반적이고 대부분 입니다. 보통 술자리에서 일대일로 대화하면 서로 대화가 잘 되는데 회의만 하면 분위기가 다릅니다. 술 자리는 인간 대 인간이 존재하는 자리죠. 팀장 대 팀원으로써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직을 하나로 만드는 일. 조직문화를 개선 하는 일. 모두 할말 하는 소통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이 [운명 공동체]에 묶여 있어야 합니다. 개인주의 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마음이 필요한데 이것은 나 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합니다. 꾸준한 자기 성찰과 노력이 필요 하겠습니다. 특히 상급자는 하급자가 처한 어려움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 선행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조직문화 활성화를 위해서 어떤 시스템을 적용 한다면 그것 이전에 개인간 경쟁을 유발하는 시스템을 먼저 제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간 경쟁을 통해서 조직을 발전 시키는 시스템이 존재 하는 상황에서는 다른 좋은 시스템을 적용해도 결국에는 개인간 경쟁을 위한 시스템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좋은 의도에서 실시한 것이 구성원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회사를 발전 시키는 원동력은 사람이지 결코 기계가 아닙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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