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2] 성서 속 인문학: 이름과 본질(2)
지난 게시물에서는 하나님이 자연과 인간에 부여한 '복(능력)'이 하나님이 만든 자연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창조물들을 만들었고, 그 창조물은 하나님이 정해둔 자연의 법칙과 같은 틀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자연의 탄생에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또 다른 생명체인 사람을 만들었을 때는 우선 왜 사람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사람의 쓰임새를 생각해보는 과정이죠. 왜? 하나님은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인간'을 필요로 하셨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인간이 자연계에 필요한 이유를 찾는 연역적 방법이 아닌 태초에 완전한 질서를 유지한 자연에 인간이 어떤 필요로 만들어졌을까?라는 귀납적 추론을 따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할까 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함이 이상적이라는 가정을 하더라도 이 이상적인 가정이 단순히 한 방향으로만 치우쳐져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천사들만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자체로 '선(善)'한 세상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겠죠. 하지만, 천사들만 창조되어 살고 있는 세상은 태초에 '악(惡)'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태초에 악이 존재하지 않았던 천사들만 사는 세상이 반드시 '선(善) 한'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태초에 '악'이 없었다는 말은 '악'이란 개념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악'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이와 대비되는 '선'이라는 개념 역시 없어지게 됩니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서로 상반되어 따로 존재하지만 사실은 어느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서로에게 묶여있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선과 악'의 개념조차 없는 세상은 이상적인 세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태초에 천사들만 사는 세상이 만들어졌다면 그 세상은 자체로 이상적인 게 아닌 거죠. 왜냐하면 항상 천사만 사는 세상은 그 자체로 평범한 세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선과 악'의 대비 개념은 성서의 창조론에도 대입이 가능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불완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만 인식 가능합니다. 불완전을 알아야 완전함도 알 수 있는 비교 개념이죠.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창조한 완전한 세상은 불완전한 무엇인가 존재해야 '완전함'이라는 평가(?)가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결정체를 '완전한 원(혹은 구)'라고 합니다. 이런 완전함은 완전하지 않은 타원이 존재해야 완전함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세계적인 천문학자 '케플러'의 이야기①가 있듯이 불완전한 타원이 존재함으로써 완전한 원의 가치가 상승하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나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가 타락했음에도 구원을 받는 이유도 절대 선의 존재는 절대 악의 존재와 함께 있을 때 빛이 난다는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다.'라고 했을 때는 그것은 반드시 완전한 선(善)을 추구하는 완전함이 아닌 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은 불완전함이 존재하기에 완전함을 알게 되는 것이고 불완전과 완전함이 혼동된 세상인 거죠. 세상에 악의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는 때로는 선(善)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악(惡)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과 악의 균형이 잘 잡혀있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지는 거죠. 하지만, 이 균형은 마치 칼날 위에 서있는 것과 같아서 불안정합니다. 이런 불안정함도 안정함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1장의 설명과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불안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바르게 돌려놓으면서 자연계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생명체가 필요하고 그 조정자 역할을 하나님은 인간에게 부여합니다. 왜 인간이냐 하면 이런 막중한 임무를 부여할 대상은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2:26,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2:27)
자연계의 법칙 속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인 활동을 하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때로는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 가혹해 보이지만, 그것이 자신과 종이 유지되고 번식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선으로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살아가면서 종을 유지(번식) 하기 위해서는 틀안에서 철저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생명체로는 자연의 균형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조정자(심판관은 아닙니다)는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명체가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기에 지극히 이타적인 사고가 가능해야 합니다. 주관적인 입장만 고수하는 사람이 심판관의 역할을 하면 반드시 사고가 나게 마련이듯이 인간은 스스로를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이 부분이 전편에 말씀드렸던 하나님이 내려주신 자연계의 '복'과 인간의 '복'이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내려준 인간 능력의 최고 결정체가 바로 '이름'을 짓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만들었을 때 이름을 직접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직접 지었다면 그냥 아담에게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가르치면 그만이었겠죠. 가장 간단한 방법을 두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라고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 이담에게 내려준 능력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는지 확인(?)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시험'일 수도 있겠죠.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계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올바른 능력이 되는지 시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담이 생물에게 이름을 짓는 행위에 어떤 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우선 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혼자 스스로 존재한다면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내가 꼭 필요한 대상에만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을 붙이면 그만이죠. 예를 들면 농사를 짓는 농부는 곡식을 베는 도구와 곡식을 터는 도구 등에 이름을 붙이면 그만입니다. 곡식을 베는 도구를 사용할 일이 없는 고기 잡는 어부가 굳이 곡식을 베는 도구에 '낫'이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길가에 자란 잡초의 이름을 몰라도 세상 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듯 실제 나와 관계없는 부분에 특별히 의미를 담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개인을 위한 행동이 아닌 나를 포함하는 전체 조직 구성원의 소통을 위한 발판을 놓는 행위입니다.
인류학적으로 언어라고 하는 것은 구강구조, 성대 구조에 의해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언어가 창조되었다면 갓 태어난 아기도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성대가 활성화되고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시작됩니다. 특히 태초의 인간은 그림이나 몸짓 만으로도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활동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지면서 그림이나 몸짓으로는 소통의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소통을 위한 다른 방법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죠. 이것도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접점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언어를 구사하는데 적합하게 창조된 성대 구조와 구강구조를 가졌다고 창조되는 순간 언어를 구사한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사까지는 인류가 개별적인 노력(자유의지에 따른 노력)에 의한 결과물(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인류 초창기 언어를 구사하기 위한 노력은 기나긴 진화의 과정이 필요했지만, 언어. 즉 이름을 만들어서 부른다는 것은 언어를 구사하기 위한 기술적. 생물학적 노력에 더해서 대상을 관찰하고 대상의 본질을 찾는 깊은 '철학적 사고'가 동반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동일한 지역 내에서 동일한 어떤 단어가 인정받으려면 그 대상이 그러한 '형태'와 그러한 '색'. '냄새'. '무늬'와 같은 특징을 지녔으며, 그 대상이 다른 대상과 다른 이름을 붙이는 고유한 특성을 자세히 관찰한 후에 그에 맞는 단어를 새롭게 창조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이러한 단계와 더불어서 누군가 생각한 이름을 다른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절차를 거치는 과정도 빼놓지 않고 필요합니다. 아주 복잡하죠. 나는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색 무언가를 '구름'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이 구름이라는 이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붙인 '구름'이라는 단어는 쓰임새가 없어져 소멸됩니다. 관찰과 해석. 그리고 동의까지 이러한 모든 절차가 원활히 진행되었을 때 비로소 어떤 대상에 이름이 붙여집니다.
쉽게 설명드리면 제가 여기에 '말(동물)'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생각하는 '말'과 제가 생각하는 말이 대부분 일치합니다. 이 '말'이라는 글자를 보고 소의 형태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이는 '말'이라는 동물의 특징이 소와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얼룩말'은 어떤가요? 그냥 '말'과 '얼룩말'이 혼동되지 않는 것은 '얼룩말'이 지닌 특징을 포함한 모든 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그 생명체에 '얼룩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사회 공동체 모두가 인정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얼룩말'을 우리는 다른 '말'과 혼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언어 발전 단계는 무척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이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대상의 근본적인 본질이 올바르게 추구될 때 비로소 그 대상은 이름을 갖게 되고 이름으로 인해서 대상이 온전한 하나의 개체로 완성된다는 이론입니다. 어떤 대상이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듯 생각나는 단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인 발전을 볼 때 하나의 단어가 갖는 본질적 힘은 그 단어가 갖는 의미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언어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은 역사적 상황을 만나 새로운 어떤 단어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다른 단어와 합쳐지거나, 혹은 의미가 전환되는 등. 마치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면 '메리트(merite)'의 경우 사람의 한 부분으로 '얻다' 또는 '상으로 받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mererer)의 명사형(meritum)에서 나온 말로서 '소득', '봉급', '특정인에 대한(좋거나 나쁘거나) 봉사', '보상이나 벌을 받을 만한 행위, 행실'을 뜻했습니다. 로마제국 후기 라틴어에서 이말은 '가치'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얻습니다. 특히 기독교 라틴어에서는 '신의자비를 받을만한 영적 가치'라는 뜻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1611년에 이 말은 특정 작품이나 예술품의 뛰어난 특성을 모두 아우르는 '장점'이라는 뜻이 더해지게 됩니다. 1636년 코르네유는 '뛰어난 지적, 도덕적 자질의 전체'라는 뜻으로 사용 했으며, 거기서 '장점. 지점'이라는 뜻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18세기에는 이 말은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주는 훈장(공로훈장)의 이름에도 사용될 정도로 언어가 변하는 변천사는 매우 변화무쌍하빈다. 외국에뿐만 아니라 한글역시 태초에 창조될 당시와 지금과 비교할 때 많은 어휘가 사라졌고, 의미역시 변화되었으며 시대의 흐름에 맞게 말하는 방법도 변화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어떤 특정인이 시작했다고 사용되는 부분도 있지만 누구나 그러한 행위에 동의를 해야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사회적으로 사용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됩니다. (주명철:1790)
이렇듯 이름을 짓고 말하는 것은 인류학적인 면에서 매우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행위였으며, 이를 볼 때 '아담'은 어떤 특정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이나 부락과 같은 하나의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단군신화 속 웅녀의 이야기가 한 마리의 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곰을 숭상하는 부족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듯이 '아담'이라는 존재 역시 어떤 한 사람이 아닌 당시 에덴동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 하류 근처에서 생활했던 부족을 지칭한다고 볼수 있습니다.(창 2:14) 이 부족이 동방에서 가장 풍족한 지역(초승달 지역)에서 살았던 만큼 개인의 능력이나 집단의 능력을 오로지 생존(먹고사는 일)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생존 활동을 넘어 고차원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담'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근처에서 우수한 지적 능력을 가진 구성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최초에 세상의 모든 대상에 이름을 지어준 일. 이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과 같은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과 본질에 대한 재미있는 의미는 [시평] 김춘수의 꽃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끝)
---<주>---
①세계적인 천문학자 '케플러'의 이야기: 독실한 기독교 신자(당시에는 서구 유럽의 모든 사람이 기독교를 믿었습니다.)였던 케플러가 천체 운동에 관한 연구를 했을 때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움직임이 완전한 원이 아니라 원에 가까운 타원인 것을 알았을 때 케플러는 심각한 종교적 고민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가 완전한 원이 아닌 것에 종교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케플러는 과학은 과학일 뿐이고 종교는 종교일 뿐이다는 결론을 내리고 케플러의 법칙을 학계에 발표합니다.
②언어의 구사까지는 인류가 개별적인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짓은 주의를 환기하기보다는 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므로, 마침내 사람은 몸짓 대신 음성의 분절화를(음성을 음절로 구분지어 발음 하는 일) 생각해 냈다. <중략> 이 바꿔치기는 공동의 동의에 따르지 않은 것이면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아직 연습을 쌓지 않은 조야한 기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 힘든데가 그 자체로서 이해하기 힘든 방법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같은 전원 일치의 동의에는 동기가 있어야만 하고, 말의 사용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말이 대단히 필요하기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루소:인간불평등 기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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