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00년 이후부터 인문학 분야가 폭발적 인기를 끕니다. 1996년 말에 터진 IMF와 함께 한국은 '세계화(글로벌)'라는 유행과 함께 인문학 시대가 도래합니다.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려는 시민의 열망은 '성공학' 을 베스트 셀러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좁아진 취업은 '자기계발'로 나타났으며, 리더십 관련 정보가 폭발적으로 쏟아 졌습니다. 대한민국에 인문학 시대가 열린 거죠.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성공'을 보장할 것같은 공부도 성공을 담보해 주지 못했습니다. 많은 리더십 공부가 올바른 리더를 양산하지 못한 경우와 같은 거죠. 왜일까요?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이닌 것이죠. 인문학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닌데 사람들은 자꾸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질문을 두 가지로 나누면 '어떻게?' 와 '살 것인가?'로 나눌 수 있습니다.'산다(Life)' 라는 것은 생존 문제입니다. 삶의 질적 문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과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동물(생명체)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답을 낸다면 이 답은 도구의 사용이라는 점에서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이 동물보다 기술적으로 높은 단계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지 도구 자체를 사용하는 것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는 소통의 도구인데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도 동물과 인간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기술적인 높고 낮음의 차이만 있습니다. 기술이 필요한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셈입니다. 결국에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높은 기술적 성취를 하는 것은 생존에 더해 쾌락(유희나 행복)을 위한 목적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높은 수준의 목적 의식이 있기에 동물보다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을 필요로 한가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을 다르게 하는 요소는 '개별적 가치'에 있습니다. 기술 문명의 발달은 생활의 다양성을 창조했으며, 이 다양성이 바탕이 되어 인간은 각 개별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창조합니다. 이런 개별성은 다른 사람과 대체될 수 없는 자기만의 가치를 만듭니다. 나를 대체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만일 생체 복제를 통해서 탄생한 복제 인간이 나와 목소리며 행동이나 버릇까지 똑같다고 해도 -심지어 감정까지 있다고 해도- 복제 인간 나를 온전하게 대체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물음에는 그렇다는 답을 선듯 내놓기 어렵습니다.
인간만이 갖는 '개별적 가치'는 결국 '어떻게?'라는 물음이 '살 것인가?' 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논점으로 만듭니다. 삶의 문제는 인간과 동물.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물음이라면'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질문입니다.
인문학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단지 '삶'에 대한 질문이 아닌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니 인간을 둘러싼 모든 삶의 요소가 인문학 범주에 포함됩니다.이런 인간 삶에 대한 성찰을 목적으로 탄생한 인문학을 개인의 범주로 좁혀보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좀더 명확해집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는 개별적 주체자에게는 나를 알고 나를 둘러싼 주변을 이해할 때 '어떻게?'에 대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가 겸비되어야 하는 것이죠.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 입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그리스 연합군은 유례없는 호황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 중심에는 아테네가 있습니다. 승전국의 호황에 취한 아테네 젊은이는 삶에 대한 성찰보다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누구나 돈을 잘 벌던 시절. 돈이 모든 삶의 목적이 된 아테네 시민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써 스스로에 대한 통찰을 역설합니다. 인문학적 통찰이 부족해진 국가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죠.
이런 성찰은 동양에도 있었습니다. 백 년 이상 끌어온 긴 전쟁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상태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외친 공자는 '앎'에 대한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그 모르는 것을 공부할 수 있으니 '앎'의 근본은 '나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앎을 깨우치는 것이 바로 개인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앎을 토대로 나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면 미래에 대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은 인간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예술. 종교. 역사 등 모든 것이 나를 둘러싼 환경이니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추구해야 나를 둘러싼 환경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범주는 매우 넓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필요한 개인의 삶은 소소합니다. 그래서 어떤 특정 학문이나 특정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다양하고 넓은 분야를 얕게 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깊이 있게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앎을 토대로 내가 얼마나 깨달음을 얻느냐에 있습니다.
도가에서는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은 큰 사람이 되고, 작은 도를 깨우친 사람은 작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이는 누군가에게 배우는 도의 크기가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얼마나 도를 크게 깨우치느냐에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강의를 직접 들어도 내가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면 그 강의를 듣는 것은 쓸모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흔히하는 이야기로 '백 날 이야기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라는 말이 있죠.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깨우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 소용없는 일. 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길을 걷는 세 사람 중에서 반드시 스승이 되는 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깨우침을 전달하는 사람의 유명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우치는 사람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아이는 어른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니 어른들이 행동을 조심히하라. 라는 의미인데 다르게 해석하면 아이를 위해서 나의 배움(깨달음)을 게을리하지 말아야하니 결국 어른이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는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게할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나 보다는 나의 후손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니 결국 아이가 어른의 스승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태도가 깨달음을 이끄는 힘이됩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어떤 공부를 하느냐?' 보다 '어떤 태도로 공부 하느냐?'를 고민해아 합니다. 결국 인문학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가 인문학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나의 삶에 가치를 더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올바른 유산을 물려 준는 것. 입니다.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열린 태도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매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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