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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구리

(패밀리) 2022. 7. 24. 09:03

이세돌과 구리

조훈현에서 이창호로 그리고 이세돌로 이어지는 계보는 한국 바둑을 세계 최고로 만들어 줬습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중국과 일본을 꺾고 한국 바둑이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던 대표적 인물입니다. 여기서 조훈현에서 이창호로 이어지는 계보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작용했지만 이세돌은 스스로 자신의 시대를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세돌은 조훈현의 충격적인 업적이나 스승을 뛰어넘은 이창호의 압도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이세돌의 기량이 두 사람보다 떨어졌던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이세돌의 기세가 변변치 않았던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세돌 시대에는 중국 국적의 프로 바둑기사 구리가 있었습니다. 이세돌과 구리는 조훈현과 승부했던 조치훈, 서봉수나 이창호에 견주었던 유창혁, 칭하오 와는 결이 다릅니다. 최강의 기사 옆에 존재했던 라이벌은 최강의 기사를 빛내주기 위한 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구리와 이세돌의 라이벌 사이는 다른 기사들의 라이벌 관계와 급이 다릅니다.  언제든 최강의 기사를 이길 수 있는 준비된 또 다른 최강의 기사를 뜻하는 것이 라이벌이라는 점에서 구리는 이전 선배 세대의 라이벌과는 확연히 다른 기사였던 것이죠.

 

구리와 이세돌의 전적올 보면 구리는 25번 이겼습니다. 1무승부를 사이에 두고 이세돌이 23번 이겼으니 두 사람의 전적은 매우 팽팽했습니다. 2승이라는 승수 차이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일만큼 미세한 라이벌 관계였던 것이죠. 두 사람은 라이벌을 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인연이라는 점에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이세돌이 1983년 3월 2일에 태어났다면 구리는 1983년 2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둘은 1995년 나란히 프로에 입단합니다. 둘은 2004년 중국 갑조 리그에서 처음으로 상대합니다. 이때는 구리가 흑을 잡고 이세돌에게 5.5집 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8년 중국 갑조 리그에서 둘의 마지막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이번에는 이세돌이 흑을 쥐고 구리에게 5.5집 승을 거둡니다. 이렇게 특이한 인연의 두 사람은 바둑 역사상 반 세기만에 10번기를 부활시키기도 합니다. 10번기는 바둑 기사로서 자존심을 걸고 임하는 승부이기에 반 세기 동안 아무도 10번기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라이벌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승부에서는 이세돌이 승리했는데, 승부 이후에 구리에게 이세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질문에 구리는 <짧은 원망, 오랜 사랑>이라고 담백하게 대답했습니다.

 

구리는 이세돌이 알파고와 4국 당시 78수를 둘 때 그 수를 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의 한 수라>고 합니다. 이후 이세돌의 이 수를 가리켜 모든 언론에서 <신의 한 수>라는 별칭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세돌의 은퇴를 가장 안타까워 한 사람도 라이벌 구리였습니다. 이세돌이 한국 기원이나 기사회의 마찰로 은퇴하던 시기 모든 기사가 눈치 보며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구리는 <너는 내가 항상 쫒던 목표였다. 나를 격려해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웠다. 지난날과 미래에 건배를 보내며 더욱 유일무이한 이세돌로 살아가길 바란다.> 이세돌의 앞날을 축복해줍니다. 이런 구리를 필두로 중국 바둑계는 이세돌의 은퇴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특집 기사를 내기도 합니다.

 

조치훈 기사는 <바둑은 목숨을 걸고 두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이벌> 앞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의 <숙명>이라는 단어가 붙기도 합니다. 어쩌면 구리가 있기에 이세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하늘은 왜 나를 세상에 내놓고 다른 누구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었나는 푸념을 할 수도 있지만 진정한 라이벌은 상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라이벌은 <애증의 관계> 인지도 모릅니다. 나를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어 줄 라이벌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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